[이우근 칼럼] 신전(神殿)에는 신( 神)이 없다
변호사/ 숙명여대 석좌교수
바티칸의 베드로 대성당에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비롯하여 베르니니의 <발다키노>, 캄비오의 <베드로 청동상> 등 뛰어난 미술작품들이 가득하다. 위대한 예술혼이 살아 숨 쉬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성당 안에는 사제나 신도들보다 관광객이 훨씬 더 많다. 그런데, 성당 안에서 신을 볼 수 없다. 교황이 있고 사제들은 많아도 정작 신이 없는 것이다.
신전(神殿)에 신이 없다니, 이상한가? 아니다. 오히려 정상이다. 스스로 자유로운 영적 실재인 신은 신전 안에 가시적(可視的) 형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초월의 신은 신전 안에도 있고, 신전 밖 어디에도 있을 터이다. 신전은 신의 집이 아니다. 신전의 신상(神像)도 신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앙의 대상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형상일 뿐이다. 신상을 신으로, 신전을 신의 집으로 믿는 것이 우상숭배다.
“하나님은 사람이 손으로 지은 집에 계시지 않는다.” 그리스도교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의 설교다. 사도바울은 신앙인 각자의 몸이 곧 성전이라고 가르쳤다. 신은 어느 건물, 어떤 형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의 삶 속에, 그들의 실존 안에 함께 있다는 깨달음이다. 성서의 십계명은 우상을 만들거나 섬기는 것을 금하고 있는데, 이 금지명령에는 야훼 신의 형상을 만드는 것도 포함된다. 형상을 만드는 순간, 야훼 신은 우상이 되기 때문이다.
성서에는 성전을 찬미하는 기록이 많이 있지만, 애당초 야훼 신은 “내 집을 짓지 말라”고 명령했다. 신의 형상뿐 아니라 아예 신전 자체를 만들지 말라는 뜻이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성전 문 앞에서 “이곳이 야훼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경고했다. 십수 년에 걸쳐 화려하게 중건(重建)된 헤롯성전을 바라보며 예수는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는 폭탄선언을 한다. 신성모독으로 십자가 처형의 한 원인이 된 발언이다. 성전은 신의 집이 아니다. 성당도 교회당도 신의 거처가 아니다. 신앙공동체의 기도와 영적 성숙을 위해 특별히 구별해놓은 공간이다.
그동안 청와대를 권부(權府)라 불러왔고, 내일부터는 용산의 대통령집무실이 그 이름으로 불릴 것이다. 황제나 국왕이 나라의 주권자이던 군주주권 시대에는 궁전이 권부였다. 백성들이 주권자인 군주를 섬겨야했지만,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민주국가는 정반대다. 권력자가 주권자인 국민을 섬겨야한다. 저 광기서린 ◯빠, △빠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신상을 신으로 섬기듯, 권력자를 주권자로 섬기는 정치적 우상숭배 아닌가? 임기 말에 허겁지겁 밀어붙인 ‘검수완박’은 또 무슨 우상을 결사옹위하려는 반민주적 퇴행인가? 진보라니, 가당치 않다.
새 정부의 첫 걸음에서도 불길한 기시감(旣視感)이 어른거린다. 권력을 주권처럼 여기는 오만과 독선의 어두운 데자뷔가…. 첫 내각의 인사과정을 보면, 오늘 물러나는 정권의 그 숱한 불통인사와 꽤나 닮았다는 느낌이 묻어난다. 영악스레 제 가족의 이익을 챙겨왔다는 의혹의 당사자들은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 대통령 주변에 친구나 학교동창, 예전 직장동료들이 얼쩡대는 모습은 적잖이 역겹다. 사사로운 연고에 얽힌 권력의 흑막을 걷어내는 결단이야말로 저 어두운 데자뷔를 지우는 신임 대통령의 사명일 것이다.
권력은 주권자인 국민으로부터 잠시 위임받은 제한적 권한에 지나지 않는다. 권력은 주권자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다. 이 원리를 망각하는 권력마다 파멸의 늪에 빠지곤 했다. 권력자가 망각하면 독재자가 되고, 공직자가 망각하면 권력의 노리개가 되며, 국민이 망각하면 우민(愚民)이 된다. 권력은 주권이 아니고, 권부도 주권의 전당이 아니다. 권부에 권력자는 있어도 주권자는 없다. 주석궁(主席宮)에는 주석상(像)이 있을 뿐 인민은 없다.
신의 이름으로 신자들을 맹신의 굴레 속에 가두듯, 인민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인민을 노예처럼 부리듯, 국민주권의 이름으로 주권자를 우롱하는 것이 위선적 권력의 기만술이다. 권부에는 주권이 없다. 신전에 신이 없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