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위헌적 합헌
이 우 근
변호사 / 숙명여대 석좌교수
조지 오웰이 <1984>에 쓴 것처럼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하기 때문일까? 진보를 외치면서 과거사에 매달려 있는 것이 한국 좌파정치의 현실이다. 1950년부터 지금껏 지속되고 있는 중국의 티베트 점령과 탄압에는 ‘70년 전 일’이라고 눈을 감으면서, 1945년에 끝난 일본의 한반도 지배에는 아직도 이를 갈며 죽창가를 부르는 중이다. 우리 서해에 곧바로 흘러드는 중국 원전 폐수의 삼중수소 수치가 4~5년 뒤에나 우리 동해로 흘러드는 일본 원전의 오염처리수보다 수십 배 더 높다는 데도, 중국에는 한마디 항의 없이 일본에만 치를 떨며 국민 불안을 키워가는 중이다. 그래야 선거 때 표가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전통을 중시하는 우파가 오히려 미래를 더 걱정하는 듯한 모양새다. 좌파는 우파의 부끄러운 과거사를 파헤치기에 여념이 없고, 이에 질세라 우파는 미래설계로 방어벽을 쌓는다. 양쪽 모두 자기네의 아픈 과거를 뉘우치는 데는 인색하기 그지없다. 희망 없는 정치다. 선전‧선동에 힘없이 무너지는 무능 보수가 수구의 틀을 벗어나고, 이념의 가면 뒤에 숨은 가짜 진보도 게걸스레 이권을 삼켜대는 위선의 껍데기를 깨뜨려야 한다.
진보를 내세웠던 지난 정권 5년 동안 천문학적 액수의 돈을 미래가치 없는 당장의 선심 예산으로 써대면서도 미래세대의 운명이 걸린 사회현안의 개혁에는 손을 놓았다. 선거 때 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천박한 포퓰리즘일 뿐 진보정치가 아니다. 도리어 보수정권이 미래를 향해 진보의 발걸음을 내디뎌야 하는 기막힌 상황인데, 보수 쪽에 과연 그럴 만한 각오나 능력이나 자질이 있는지 의문이다. 지금의 상황으로는 미심쩍어 보인다. 과거를 거울삼아 미래를 바라보며 현재를 개선해 나가는 것이 정치 본연의 책임이다. 무능 보수와 가짜 진보를 끊어내는 것이 과거를 거울삼는 일이요 연금‧노동‧교육 개혁이 미래를 위한 설계라면, 안보와 민생의 내실화는 현재의 삶의 터전을 굳게 다지는 일이다.
이 모든 것, 과거·현재·미래의 과제가 대한민국 헌법 전문(前文)에 이미 담겨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 3·1운동과 4·19 민주이념'은 과거의 거울, '평화적 통일과 정의·인도·동포애의 민족단결'은 미래의 목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확립, 균등한 기회의 보장,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의 완수'는 현재의 사명이다. 헌법정신은 ‘안으로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하여, 우리와 우리 자손의 안전‧자유‧행복을 영원히 확보’하는 것이다. 그것이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길이다.
헌법이 제정된 지 75년을 지내는 동안, 그 많은 정권과 정치인들은 도대체 무슨 일을 어떻게 해왔기에 아직껏 나라가 이리도 혼란스러운가? 헌법을 몰랐거나, 알았어도 지키지 않았다는 뜻이다. 헌법정신보다 권력욕이 더 컸기 때문일 터이다. 이제껏 노회한 권력자들은 후계자를 기르지 않았다. 누군가 새로운 정치영역을 스스로 개척해 등장하려고 하면 어떻게 해서든지 가로막고 미래의 싹을 잘랐다. 자기만이 늘 현재 권력의 중심에 있으려는 탐욕과 아집,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는 근시안적 어리석음이 불러온 국가적 불행이다.
미학자요 철학자인 조르지오 아감벤은 ‘민주주의가 전체주의로 후퇴하는 이유는 정치행위의 유일한 기준이라고 할 수 있는 헌법적 합의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위헌을 합헌으로 가장하는 정치적 합의가 헌법을 왜곡하고 민주주의를 파괴한다는 아이러니다. 헌법 없는 전체주의 체제가 있었던가? 헌법을 내세우지 않는 독재권력이 있었던가?
위헌적 합헌… 모순이지만, 정치 현실에서 실제로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다. 지난날 위헌적 조치나 정략을 합헌이라고 우겨댄 권력, 그 힘에 굴복한 언론과 사법판단이 얼마나 많았던가? 다수의석을 동원한 위헌적 입법은 또 얼마나 많은가? 제헌절 75주년을 맞으면서, 헌법이 다시는 권력욕이나 가짜 이념의 손에 합헌이라는 이름으로 더럽혀지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