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영수의 코미디 40년 연예비사 잡역만 하던 전원주, 서민의 우상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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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영수의 코미디 40년 연예비사 <33-1> 잡역만 하던 전원주, 서민의 우상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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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주와 엄영수. /엄영수 제공


#. 대학 나와 식모살이 웬말이냐! 앞치마만 벗겨다오

학창시절 전원주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꿈 많은 문학소녀로서 글재주도 좋았다. 숙명여대 국어국문학과를 나와 진화여상에서 국어선생님으로 3년간 아이들을 가르쳤다.


“정든학교 정든학생들을 떠나려니 마음이 아팠어, 쉽지 않았지. 나라가 커지니까 애들이 갑자기 커지드라구. 학교에 가면 아이들한테 갇혀 버려! 나보다 키작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어. 젊은시절 내 목소리는 너무 너무 고왔어. 이걸 살려 볼려고 성우시험(1963년 동아방송 1기)을 봤는데 합격을 했어! 집에서 알까봐 대본을 들고 북한산에 올라가서 몰래 연습을 했는데, 연습벌레가 따로 없었지. 산 속에서 그냥 살뻔했다니까. 라디오 드라마를 듣던 TV PD가 박경리 원작의 대하드라마 '토지'를 만들 때 내 목소리에 반해서 나를 캐스팅하려고 찾아 왔었잖아. 물론 그 후로 연락이 없었어, 무산 된거지. PD가 나중에 나한테 고백을 하더라고 직접 만났을 때 너무 당황했었데. 목소리하고는 너무 대조적이었다나, 어쨌다나. 어머나 어머나 어떻게 그런 얘길하냐?”


탤런트를 한다니까 어머니가 극렬하게 반대했다.

“이 거울을 봐라. 거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네 얼굴 갖고 세상천지 다니면서 잘난 체해도 누가 인정하겠니. 나도 안 속는다.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양심이. 저게 뉘집자식이냐? 소리나면 부모님 걱정끼치는 거 아니냐? 정성 들여 돈 들여 대학졸업시켜서 선생님 만들었더니, 다 걷어치우고 방송이랍시고 그깥 하나마나한 엑스트라역이나 하면서, 세상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우리 집안이 어디가 어때서 방송에 나가면 주인한테 매일 굽신굽신거리고 무시당하고 식모와 몸종으로 밑바닥을 기어야 되냐?”


어머니의 만류에 아버지께 도움을 청했더니, 아버지까지 어머니와 합세해서 더 크게 야단을 쳤다. 딸 전원주가 전하는 어머니의 말씀은 기왕할려면 잘 하라는 격려의 취지였을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는 손발이 크고 마음이 넓은 분이었다. 곧 이어 매니저 기획사 스폰서 역할까지 자청해서 했다. 딸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눈덮힌 지리산 골짜기 야외 녹화장 어머니가 따뜻한 대형 텐트를 치고 스태프, 배우를 비롯한 팀 전원에게 며칠간 파티를 열어 주었다. 제발 내 딸 앞치마만이라도 벗겨서 식모를 면하게 해달라는 어머니의 간절한 소망을 전했다. 딸은 겁이 났다. 혹시 제작진이 오해해서 역효과가 나면 어쩌나, 동료 선후배 연기자가 로비를 했다고 시비를 걸면 어쩌나…. 그 후로 분명히 달라지긴 달라졌다. '대추나무 사랑걸렸네'에도 출연했고, 다른 평범한 신분의 인물로도 출연했다. 그런데 식모를 할 때는 자신감이 넘쳤고 자연스러웠는데 다른 지체 높은 배역을 맡았더니 몸이 굳고 대사가 자유롭지 않았다.

몇 달 후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니 살 것 같았다. 식모는 나의 천직이다. 나의 생명이다. 나의 존재의 이유다.


#. 전쟁터에서 돈버는 개성상인

1951년 1.4후퇴 때 고향 개성에서 어머니의 주도로 부모님과 2남2녀 여섯식구가 3.8선을 넘어 인천항을 향해 출발했다. 보통사람들은 강, 바다, 차를 선택하는데 특이하게 어머니는 산행을 택했다. 큰딸 전원주는 남장에 얼굴에 검댕이 칠을 하고 위장을 했다. 개성에서 산으로 산으로, 남으로 남으로 옮겨 인천까지 무사히 왔다. 부산으로 후퇴하는 배가 일찍 끊기는 바람에 인천항에 남게 됐다. 이것이 전화위복이 되었다.


만약 부산에 가게 됬다면 서울에 살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 지방사투리를 습관화 시켜놓으면 연기자 생활하는데도 지장이 많았을 것이다. 어머니는 개성상인의 실력을 발휘해서 떡장사를 했다. 전쟁터에서는 먹는 장사가 큰 비전이 있을거라 생각한 것이다. 이웃에게 먹거리를 줄 수 있다는 것, 베풀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 않은가? 어머니가 떡을 만들면 전원주는 떡배달을 하고 동생들은 이고 다니며 팔았다. 아버지는 가게를 지켰다. 온 식구가 떡장사에 매달렸다. 돈벌이가 잘됐다. 어머니는 씀씀이가 컸다. 

동네 사람들을 위해 통큰 기부도 많이 했다. 오죽하면 집안에 스피커 장치가 돼 있어 잔치행사 날에는 동네에 대고 방송을 할 정도였다. 돈을 벌어 서울로 이사를 했다. 단위를 높이고 동대문 상가 비단상회를 차렸다. 일단 손님이 오면 어머니는 거하게 진하게 잘 먹인다. 그리고 물건을 살 때까지 죽기살시로 붙잡고 늘어져서 그냥 내보내지 않는다. 한 얘기 다시 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팔고야 만다. 비단장사 역시 대박이 났다. 개성상인의 진면목을 봤다.


#. 개성이 고향, 통일 위해 파주 땅 10만평 준비!

어느 해인가 연기자들이 개성공단을 방문하는 일이 있었다. 공단견학, 공단체험이야 많이 다녔지만 북한 노동자들이 일하는 모습을 직접 본다는 것, 그들의 생활을 알아본다는 것이 관광상품이 되는 것이다.

공단 북한 노동자가 우리 측에서 받는 급료는 북한 상류층의 소득보다 훨씬 높다. 초코파이를 간식으로 주는데 먹지 않고 집에 가져가면 식구들이 너무너무 좋아했다.


그러다 보니 공단에서 받은 간식을 팔아서 용돈을 만들기도 한다. 아쉬운 것은 북한 노동자들과는 한마디도 말을 건네서는 안 되고 그들 또한 어떤 대답도 하지 않는다. 그저 쳐다보기만 할 뿐이다. 본다는 것은 벌써 교류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들도 눈이 있고 생각이 있다. 북한은 이것이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개성공단은 패쇄됐다. 개방에 따른 약점노출, 노동자들의 자유세계에 대한 동경이 큰 부담이 됐을 것이다. 북한 상품점에서 쇼핑하는 시간이 있었다. 북한 술은 입안에 있을 때는 술이다. 삼키고 나면 술이 없어진다. 


여운이 없다. 향기가 남지 않는다. 술은 마시기 전보다 마시고 난 후에 뒤끝 뒷맛이 끈끈하게 전해져야 높이 평가를 받는다. 북한 술은 마시고 나면 무엇을 마셨는지 알 수가 없다. 맹탕이다. 이걸 또 좋아하는 마니아도 있을 것이다. 


전원주 선배께 북한 술 중에 최고급이라는 소주를 한 병 사드렸다. 집안에 장식용으로 보관하든지 집안 어르신께 드리면 좋겠다 싶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이야기를 전했는지 술 한 병 정도 선물하고 이렇게 오랜기간 칭찬을 받고 화제에 오르내린 적은 없었다. 엄영수는 어른을 잘 모셔. 나는 엄영수 팬이야 엄영수가 어떻게 나한테 선물할 생각을 했을까, 하는 짓이 예쁘잖아, 전하는 사람마다 말이 다 틀린다. 그래도 기분은 아주 좋았다. 아주 좋아!


전원주 선배는 고향이 개성이다. 고향에 가서 후배 연기자에게 선물을 받으니 이 또한 남 달랐으리라. 전원주 선배의 부모님은 어떤 분인가?


통일을 믿었다. 개성공단 조성, 남북관계 개선, 이산가족 찾기 등 상황이 있을 때마다 관심이 놓았다. 통일을 위해 준비를 했다. 남북통일이 되면 파주는 개성과 더불어 거대도시로 부상할 것이다. 전원주 선배의 집안은 파주에 통일을 대비해서 10만 평이 넘는 땅을 사서 기념관, 공원, 공연장, 물류 전진기지 등으로 활용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고 한다. 문제는 통일이 안 되고 있다는 것이다. 통일은 언제 될 것인가, 묻거나 따지면 바보 아닌가. 결국 통일을 못 보고 돌아가셨다. 준비된 10만 평은 통일을 기다린다. 대단한 결단이다. 이런 가족을 봤는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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