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여우와 고슴도치
이 우 근
변호사 / 숙명여대 석좌교수
누군가를 가리켜 ‘여우 같다’고 하면 약삭빠르고 잔꾀를 잘 부리는 요물처럼 보인다는 말로 들린다. 여우는 꾀가 많고 교활하다. 사람보다야 못하겠지만, 매우 간사하고 영악하다. 꼬리가 아홉 개 달린 구미호 이야기는 뛰어난 둔갑술로 몸을 자유자재로 바꾸면서 사람을 홀리는 요사스러운 여우를 소재로 한 민간설화다.
“여우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고슴도치는 하나의 큰 것을 알고 있다.” 고대 그리스 시인 아르킬로코스의 말이다. 온갖 꾀를 지닌 여우도 한 가지 든든한 방어수단을 가진 고슴도치를 쉽게 이기지 못한다는 뜻일 게다. 위험을 만나면, 고슴도치는 다리를 배 쪽으로 끌어당겨 몸을 둥글게 말아 넣고 온몸에 빈틈없이 돋은 가시를 곧추세워 제 몸을 지켜낸다.
고슴도치의 천적은 흔치 않다. 가끔 수리부엉이나 올빼미가 큰 부리로 고슴도치를 낚아채기도 하지만, 온몸을 뒤덮은 가시 때문에 좋은 먹잇감이 되기는 아예 글렀다. 그렇지만 고슴도치의 가시는 때로 자신에게 방해물이 되기도 한다. 서로 가까이하자니 상처를 입기 쉽고, 멀리하자니 냉랭해진다. 쇼펜하우어는 이것을 ‘고슴도치의 딜레마’라고 불렀다. 서로의 가시가 닿지 않을 만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그 거리가 인간관계의 예절이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는 것도, 너무 멀리 떨어지는 것도 예절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영국학술원장을 지낸 아이제이야 벌린은 아르킬로코스의 말을 받아 인간을 여우형과 고슴도치형으로 나눈다. 세상의 모든 일을 하나의 분명한 목표, 하나의 일관된 흐름으로 환원시키려는 사람을 고슴도치형인 이상주의자, 서로 모순되거나 다양한 일들을 그것들 나름의 목표로서 함께 추구하는 사람을 여우형인 현실주의자로 분류했다. <전쟁과 평화>를 통해 톨스토이의 역사의식을 추적한 벌린은 톨스토이가 ‘고슴도치를 꿈꾼 불행한 여우’였다고 분석한다. 다양하고 이질적이며 잡다한 역사적 현상들 속에서 하나의 일관된 원칙을 끄집어내려고 고심했다는 것이다.
벌린에 따르면, 중요한 하나를 깊이 알고자 했던 플라톤‧니체‧도스토옙스키는 고슴도치였고 많은 것을 널리 알고자 했던 아리스토텔레스‧셰익스피어‧괴테는 여우였다. 고슴도치형은 어떤 문제에서도 단 하나의 해결책만을 고집하는 흑백논리에 빠지기 쉽다. 둘 다 장단점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기에 어느 쪽이 더 나은지는 단언할 수 없다. 다만 목표는 고슴도치처럼 명료하고 이상적이어야 하며, 그것을 추구하는 방법은 여우처럼 다양하고 현실적이어야 할 터이다.
나라와 사회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단 하나의 공상적 유토피아만을 추구하는 전체주의나 공산주의는 물론이고, 소외계층의 절박한 현실을 외면한 채 ‘보이지 않는 손’에만 의존하는 자유방임의 시장만능주의도 비현실적인 고슴도치형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고슴도치의 잘못이 아니다. 목표설정의 잘못이다. 자유와 평등, 성장과 분배, 시장과 복지, 안보와 인권… 어느 것 하나도 배제해서는 안 될 국가목표다. 시대와 상황에 따른 우선순위가 있을 뿐이다.
북한은 경제‧문화‧교육‧언론을 모두 희생시키면서 오직 핵무장 하나에만 매달리는 고슴도치형이다. 방어용이라고 핑계하지만, 진짜 목적이 ‘백두혈통 3대 세습정권 지키기’와 ‘한반도 무력통일’이라는 것은 이미 비밀도 아니다. 북한은 핵공격의 표적이 서울이라고 밝혔다. 핵무기는 고슴도치의 방어용 가시가 아니다. 언제고 무시무시한 공격무기로 돌변해 날아올 수 있다. 한국의 대응수단도 마뜩찮다. 여우는 고슴도치를 이기기 어렵다. 도리어 고슴도치의 가시에 찔려 상처를 입기 십상이다.
한국은 정치‧경제‧문화‧교육 등 모든 부문에서 개성과 다양성의 숨결이 넘쳐나고 있다. 그 혼란상이 거의 방종과 무질서에 가깝다. 한국 사회는 여우형이 분명하지만, 그 다양성을 통합하고 추스를 만한 중심목표가 흔들리고 있다. 자유민주주의와 대중영합주의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중이다. 북한은 개인의 자유와 사회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여우형으로, 한국은 혼란스러운 다양성을 한데 아우르는 고슴도치형으로 바뀌어가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