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쩌민 前주석 사망... 경제 2위 대국 발판 만들어
1995년 11월 15일 장쩌민(왼쪽) 당시 중국 국가주석이 청와대에서 김영삼 대통령을 만나 환하게 웃으며 악수하고 있다. 장 전 주석은 백혈병 등으로 투병하다 30일 상하이에서 사망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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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江澤民·96) 전 중국 국가주석이 30일 사망했다. 중국 국영 CCTV는 이날 오후 “장 전 주석이 낮 12시 13분 상하이에서 백혈병과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타계했다”고 보도했다. 장 전 주석은 지난 10월 공산당 제20차 전국대표대회(당대회)에 불참해 건강 이상설이 제기됐었다. 장 전 주석은 개혁·개방의 설계자였던 덩샤오핑의 뒤를 이어 집권해 중국을 세계 2위 경제 대국 자리에 오르는 기반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의 중국 전문가 로버트 로런스 쿤은 장 전 주석 평전에서 그를 “중국을 변화시킨 거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장 전 주석은 공산당이 노동자·농민뿐만 아니라 자산가·지식인의 이익까지 대변해야 한다는 ‘3개 대표 이론’으로 시장경제 도입의 이론적 토대를 만들었다. 경제 전문가 주룽지(朱鎔基) 총리를 발탁해 계획경제 체제 당시의 금융, 국영기업 체제에 대수술도 단행했다. 그가 처음 지도자에 오른 1989년 1조6922억위안이었던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은 15년 뒤 10배로 커졌다. 미국과의 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해 2001년에는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도 성사시켰다. 1992년 한중 수교의 주역이기도 하다.
장 전 주석은 1926년 중국 장쑤성 양저우에서 태어났다. 그는 상하이 자오퉁(交通)대 전기과를 졸업한 공학도지만, 시와 문학에 능했고 피아노와 기타, 중국 전통 현악기인 얼후 등을 연주할 줄 알았다. 영어를 잘해 공식 석상에서 자주 영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2000년 10월 베이징 중난하이 집무실에서 노골적인 질문을 퍼붓는 홍콩 기자에게 “너무 어리고, 너무 단순하다(too young too simple)”고 꾸짖은 장면은 유명하다.
평범한 기술 관료로 평생을 보낸 장 전 주석을 최고지도자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였다. 당시 상하이시 당서기를 맡고 있던 그는 시위가 확산하자 메가폰을 들고 거리로 나가 학생들과 직접 대화함으로써 시위가 극단으로 이르는 것을 막았다. 유혈 진압으로 이어진 수도 베이징과 뚜렷이 비교됐다.
장 전 주석은 그해 6월 덩샤오핑에 의해 공산당 총서기로 발탁됐다. 이어서 같은 해 12월 군권(중앙군사위 주석직)을 넘겨받았고, 덩샤오핑이 은퇴한 직후인 1993년 중국 국가주석에 오르며 당, 정, 군을 장악했다. 2002년 후진타오에게 주석직을 넘겨주면서도 군권은 2년 간 더 쥐고 있었다. 그는 최고 권력자가 된 뒤에는 톈안먼 시위 재평가 요구 등에 대해 “일말의 관용도 없다”며 강경 대응하며 사상적 통제를 강화했다. 1989년 11월 “언론은 부르주아 해방의 발언대가 돼선 안 된다”며 언론사 통폐합을 주도했고, 파룬궁 등 종교 집단에 대해서도 탄압했다.
그는 당과 정부, 군에 방대한 상하이방(上海幇) 인맥을 구축해 권력 기반을 쌓았지만, 시진핑 국가주석이 등장한 이후에는 세력이 급격히 약화됐다. 시 주석 집권 5년 만에 장쩌민 계열 인사 300여 명이 ‘반부패 칼날’에 낙마한 것으로 관측됐다. 이 때문에 장 전 주석과 시 주석의 갈등설은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2017년 당 대회 때는 시 주석이 연설하는 동안 장 전 주석이 시계를 보며 지루해하는 장면이 전파를 탔다.
장 전 주석은 1992년 한중 수교의 주역으로, 양국 관계를 증진시킨 중국의 최고 지도자로 각인돼 있다. 1995년 11월 중국 국가주석으로는 처음으로 서울을 방문해 김영삼 당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장쩌민 방문 외교 실록’에 따르면 그는 한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수행원들에게 “한국은 나라도 작고 인구도 적고 자원도 없지만 30년의 짧은 세월 동안 이 같은 수준까지 발전한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며 “오늘 이후 우리가 어떻게 해나가야 할지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강조한 것으로 기록됐다. 1998년에는 중국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통해 양국 관계를 ‘협력 동반자 관계’로 격상시켰다.
이벌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