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광의 행복칼럼] 거창고 전영창 교장님의 꿈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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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광의 행복칼럼] 거창고 전영창 교장님의 꿈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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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쉐어USA 대표


경상남도 시골의 거창고등학교가 주목을 받은 것은 제법 오래 전 일이다. 시골의 사립고등학교가 주목을 받는 것은 교육이념 실천 때문이다. 학교마다 교육이념이 있지만 실천하는 학교는 드물다. 거창고는 훌륭한 교육이념과 교육이념의 건강한 실천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진학률도 좋아 경남에서 김해외고 다음으로 진학률 2등이다. 일반 인문계에선 단연 1등이다.    

   

거창고등학교는 고 전영창 교장의 설교제목으로 만들었다는 직업선택의 십계명으로 유명하다. 여기에 교육이념이 담겨있다. 거창고에는 인문계고교에서 보기 드문 문화가 있다. 예컨대 무감독시험(현재는 폐지된 듯), 전교생 대부분이 기숙사생활, 눈이 내리면 토끼몰이, 그리고 봄가을에 열리는 예술제 등등이다.  

   

거창고는 원래 호주선교사들이 설립해서 운영했다. 1953년 선교사들이 떠날 때 교육열을 가진 거창의 유지들이 인수했다. 그러나 재정적 압박을 견디지 못하여 폐교를 해야 할 상황이었던 1956년에 전영창 교장이 인수해 학교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당시 학교상황은 형편이 없었다. 비가 오는 날은 교사와 학생 모두 우산을 들고 수업을 했다고 한다. 

   

전영창 교장은 1917년 12월 26일 전북 무주군 적상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졸업 후 선교사의 도움으로 전주 신흥학교로 진학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앞장섰던 그를 눈여겨 본 신흥학교 교장 린턴 박사가 후원하여 1938년에 일본 고베 중앙신학교에 유학했다. 그러나 과거 신사참배 거부운동이 문제가 되어 1년간 감옥살이를 한 후에 추방됐다.

   

8·15 광복 후 전영창은 미 군정 군종과 통역관이 되었다. 미국 신학교에 유학하고 싶은 그의 포부를 들은 장교가 벧졸드 군종목사에게 보고했고, 벧졸드 군종목사 주선으로 1947년 대한민국 최초 미국 유학생이 되었다. 유학법이 없던 당시 미군 군종부의 도움으로 전영창 교장은 유학을 했다.

   

유학 중 6·25로 조국이 위기인 것을 알고 귀국을 결심했다. 신학교 학장은 “전쟁 중에 왜 귀국하느냐 가족을 초청해 줄 테니 공부를 계속하라”고 권했지만 전영창은 귀국을 고집해 한 학기를 앞당겨 조기졸업 후 귀국했다. 부산 앞바다에 여차하면 도망하려는 졸부들의 배들이 즐비했던 시절이었다.

   

전영창은 귀국하며 미국 성도들이 모아준 5000달러로 부산 제일영도교회를 본부로 구호활동을 했다. 전쟁난민들을 치료하기 위한 복음구호의원(지금의 복음병원)을 설립하였다. 마침 북에서 피난한 장기려 박사를 원장으로 초빙해 휴전이 될 때까지 구호와 의료지원 활동을 했다.

   

휴전이 되자 전영창은 다시 도미해 콘코디아 신학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공부하고 1956년 1월에 귀국했다. 그때 한남대학교 설립자 겸 초대학장이자 그의 신흥학교 은사였던 린턴 박사가 그를 한남대 부학장으로 초청했다. 하지만 그는 대학 부학장 대신 쓰러져가는 거창고 교장으로 취임했다. 이런 그의 헌신과 희생이 찬란한 거창고의 기초가 됐다. 

   

전영창 교장은 학교가 너무 어려워 미국에 모금 출장을 가면서 비행기표 값이 없어 입양되는 영아를 비행기에서 돌보며 무료 비행기를 타고 도미하여 미국 교회에서 도움을 호소했다. 친구인 로버트 슐러 목사의 도움으로 교사와 강당을 신축했고 그의 열정과 가슴을 제자들에게 나누다 순직했다. 조국과 다음 세대를 지극히 사랑했던 고 전영창 교장의 신앙, 애국, 꿈 그리고 헌신을 배우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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