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등] 사라지는 직업, 등대지기(2)
이보영
한진해운 전 미주지역본부장
얼어붙은 달 그림자 물결 위에 차고/ (중략) / 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어린시절부터 익히 불러 온 동요, 가히 국민가요라 할 만큼 불려오는 등대지기, 서정적인 노랫말과 아름다운 멜로디 가락이 우리들 머릿 속에 깊히 박혀 있다. 이 노래의 원곡은 19세기 미국 찬송가 'The Golden Rule'에 실린 작자 미상의 찬송이었는데, 메이지(明治)시대 때 일본에 전래되었고, 그 일본어 가사를 한국어로 번안한 것이라 한다.
등대지기(Lighthouse Keeper)는 항해자들에게 선명한 불빛을 비추어 주고, 등대를 관리하는 사람이다. 예전의 등대지기는 기름통에 늘 기름을 채워 램프 심지에 불이 꺼지지 않도록 살피고, 램프 유리창에 그을음이 끼지 않도록 닦아내고, 안개 낀 흐린 날에는 무적(霧笛: Foghorn)을 울려 소리가 멀리까지 퍼지게 하는 일이 본업이었다. 또 등대탑이나 등대 주변에 바닷새 무리들의 배설물이나 버려진 둥지를 치우고 소독하는 작업도 해야 한다.
현대판 등대지기의 본업은 좀 진화되었다. 등명기(Gyroscope Light)가 밝게 잘 작동하도록 발전기와 관련 장비를 늘 점검하고, 해양기상을 관측해 3시간마다 기상청이나 해경에 보고하고, 안개나 구름이 짙은 흐린 날엔 음파 송신기를 작동시키고, 선박들과 무선통신도 주고 받는 일을 한다. 주말이나 연휴엔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등대의 역사, 역할을 설명하고, 전망대와 화장실을 개방하는 일도 한다.
최근엔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대부분의 선박들은 항로시스템(GPS)과 레이더를 장착하고, 해양기상 정보를 실시간 공급받음으로 등대 의존도가 예전보다 훨씬 약화되었다. 업친데 덥친격으로 등대지기 직업을 기피하는 현상으로 유인등대가 점차 무인등대로 전환되고 있다.
물론 오랜 역사를 지닌 석조 대형등대는 관광용, 또는 보존용으로 등대지기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어두운 세상을 밝히고, 냉혹한 민심 속에 누군가에게 등불이 되는 사람”도 등대지기라고 한다. 인생도 어찌보면 세파에 흔들리며 방향 잃고 떠내려가는 일엽편주(一葉片舟)에 불과한데, 누군가의 격려의 말 한마디는 등대의 불빛처럼 내 존재의 좌표를 인식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가족에게는 가장(家長)이 등대요, 제자들에겐 선생님이 등대이며, 백성들에겐 임금님이 등대이다. 지금도 지구촌 한 편에서는 거의 1년 이상 전쟁으로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고 도시가 파괴되고 있다. 또 다른 한 편에선 대지진으로 졸지에 건물들이 무너져 잿더미 속으로 수많은 생명이 묻혀버리고 생의 터전을 잃어버린 유족들의 처참한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우방국들이 현지로 구조대를 급파하고 구호품을 전달하는 봉사들이 아비규환 속의 등대가 될 것이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칠흑같은 밤에 큰 여객선 하나가 클리브랜드 항구로 향하고 있었다. 때마침 폭풍이 불어 파도는 산처럼 밀려오기 시작했다. 배는 거의 클리브랜드 근처에 가까이 왔는데 등대불은 비추지 않았다. 선장은 당황해서 견시원(Crew of Lookout)에게 물었다.
“여기가 분명히 클리브랜드 항인가?"
“네, 분명히 클리브랜드 항입니다” 견시원은 대답했다.
선장은 근심스런 소리로 “그런데 왜 등대가 보이질 않는거야?”
“등대불이 다 꺼져있는 것 같습니다” 견시원이 힘없이 대답했다.
그날 밤, 그 배는 파도에 밀려 항로를 잃었고, 결국 암초에 부딪혀 침몰하면서 대형참사를 빚었다.
무디(D. L. Moody) 전도집회의 찬송 인도자였던 블리스(P. P. Bliss)는 당시(1871년) 미시간 호수의 해상사고를 떠올리며 작사, 작곡한 찬송이 지금도 널리 불려지는 ‘하나님의 진리등대’ 이다.
하나님의 진리 등대 길이 길이 빛나니/ 우리들도 등대되어 주의 사랑 비추세/
죄의 밤은 깊어가고 성난 물결 설렌다/ 어디 불빛 없는가고 찾는 무리 많구나/
우리 작은 불을 켜서 험한 바다 비추세/ 물에 빠져 헤메는 이 건져내어 살리세/
남을 위해 등불을 밝히다 보면 내 앞이 먼저 밝아진다. 바다의 등대지기는 사라져 가지만, 험한 세상을 밝게 비추어주는 등대지기는 더욱 절실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