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노맨의 목소리, 애증의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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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근 칼럼] 노맨의 목소리, 애증의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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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우 근 

변호사 / 숙명여대 석좌교수 


뉴욕 세계무역센터를 덮친 9.11 여객기 테러가 발생하자 미국인들은 분노와 복수의 애국심에 불타올랐고, 그 애국심을 등에 업고 미국 연방하원은 ‘테러응징을 위한 병력 동원’을 결의했다. 미국 정부는 무한정의(無限正義)라는 이름의 군사작전을 전개하고 테러의 배후로 의심되는 알카에다의 은신처인 아프가니스탄에 미사일과 포탄을 퍼부었다. 


테러에 대한 응징과 보복은 정의의 요구임이 틀림없다. 그렇지만 테러와의 관련성이 뚜렷이 입증되지 않은 아프가니스탄을 보복공격의 표적으로 삼은 데에는 많은 의문과 비판이 뒤따랐다. 가난한 나라의 죄 없는 백성들과 순진한 어린아이들이 무한정의라는 이름 아래 영문도 모르는 채 죽어가야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미국 연방하원의 응징 결의는 뜻밖에도 단 한 사람의 노맨(No Man), 아니 노우먼(No Woman) 때문에 만장일치로 가결되지 못했다. 그 반대표는 민주당 소속인 흑인 여성 바바라 리 의원이 던진 것이었다. 그녀가 무력응징을 반대한 것은 테러를 찬성해서도 아니고 애국심이 부족해서도 아니었다. ‘피의 보복은 또 다른 피의 보복을 부른다’는 이성적 확신 때문이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정의’를 실현할 능력이나 자격이 있는가? 로마의 법언(法諺)은 ‘극단의 정의는 극단의 불의’라고 선언한다. 인간의 정의는 차선(次善)의 정의, 제한적 정의에 머무를 뿐 결코 무한정의를 실현할 수 없다. 인간이 스스로 무한정의를 외치는 것은 인간 생명을 복제하는 것 이상으로 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일일 것이다. 겸손하지 않은 정의, 자제를 모르는 정의는 증오와 복수심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모세 율법을 해석한 <미슈나>는 ‘만장일치의 사형선고는 무효’라고 단정했다. 고대 이스라엘의 산헤드린 공의회도 만장일치의 유죄 판정을 무효로 취급했다. 만장일치는 ‘집단지성’의 합리적 결론이기보다 ‘집단감성’의 충동적 선택이기 십상이다. 악행의 끝을 치달린 히틀러를 열렬히 지지한 것은 다수 독일국민이었고, 법정에서 유죄평결을 받은 범죄혐의자가 차기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될 가능성이 높은 현실도 다수 지지층의 박수 소리 탓이다. 


정치권력은 대중의 감성을 자극하는 선동수법을 즐겨 쓴다. 그것이 이성의 목소리를 잠재우고 다수 국민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권력과 대중의 감성적‧불륜적(不倫的) 결합은 비극의 종말을 맞는다는 것이 역사의 가르침이다. 권력이 바른길을 벗어나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주는 것은 다수의 뜨거운 환호가 아니라 노맨의 작은 목소리다.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집단감성의 파도를 안전하게 헤쳐나갈 수 있는 이성의 조각배는 흔치 않다. 감성의 폭풍 속에서 홀로 이성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다수로부터의 배척을 감수해야 하는 희생의 고통을 동반한다. 


“인류 역사는 고통받는 소수에 의해 진전되어 왔다.” 톨스토이의 신념이다. 저 위대했던 역사 속의 노맨들을 존경하면서도 스스로는 노맨이 될 용기를 지니지 못한 것이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이다. 그저 다수의 울타리 안에 숨어들어 저들의 입에 발린 구호를 앵무새처럼 졸졸 따라 읊조릴 따름이다. 고독한 노맨의 외침을 만나면 다수의 편에 서서 그를 비난하기 일쑤다. 


현재권력의 눈치를 살피며 그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몸을 잔뜩 사리는 여당에서도, 미래권력을 꿈꾸는 형사피고인을 방어하느라 전력투구하는 야당에서도, 그리고 증오와 적개심을 분별없이 뿜어내는 양쪽의 극렬 지지층에서도 합리적 이성의 목소리는 좀처럼 들려오지 않는다. 예스맨들이 들끓는 위선과 거짓의 세상에서, 고난과 소외를 각오한 용기 있는 노맨의 목소리가 몹시도 아쉬운 시절이다. 


역사 속에서는 찬양받는 합리적 이성의 소수가 현실의 삶에서는 배척당하는 애증(愛憎)의 아이러니… 역사의식과 삶의 자리가 어긋난 심각한 병리현상이 아닐 수 없다. 박해와 희생을 무릅쓴 노맨의 작은, 그러나 절절한 외침이 광기 서린 감성의 암흑시대를 밝히는 한줄기 이성의 등불로 환히 빛나기를 고대해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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