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등] 미국엔 왜 ‘국적선사’가 없을까
이보영
전 한진해운 미주본부장
미국 땅도 한반도처럼 삼면(三面)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동부 해안은 대서양과 맞닿아 있다. 동부해안은 영국과 유럽에서 대서양을 건너 온 이주민들이 정착하면서 미국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다. 서부해안은 태평양과 맞닿아 있다. 서부해안은 19세기에 들어 중국과 아시아의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물동량의 증가로 활기를 띠게 되었다. 서부해안과 아시아는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환태평양시대(Age of Pacific Rim)로 세계경제를 이끌었다.
동부의 뉴욕이 19세기초까지 미국의 관문이었다면, 서부의 LA는 19세기 후반부터 미국의 관문이 되었다.
남부해안은 ‘멕시코 만(Gulf of Mexico)’과 맞닿아 있다. 멕시코 만은 미국의 남부, 멕시코의 서북부, 쿠바의 동북부로, 3개 국가에 둥굴게 둘러싸인 작은 바다, 만(Gulf)이다.
미 대륙은 대서양과 태평양 사이에 끼여 있는 거대한 땅이다. 이 땅의 동서 횡단도로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해 주는 다리(Bridge)같다고 해서 ‘랜드 브릿지(Land Bridge)’라고 부른다. 특히, 해운물류에서는 대륙횡단철도를 ‘미니랜드 브릿지(MLB : Mini-Land Bridge)’ 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이처럼 미국은 지리적으로 삼면이 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지구촌 5대양 각 곳에는 미국령(領)에 속하는 섬나라들도 있기 때문에 해상수송은 필수불가결이다. 더 더구나 미국은 세계에서 최대 수출입 물동량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현재 미국의 국적(國籍) 해운사가 없다는 것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애시당초부터 국적선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왕년엔 USL, Sea-Land, APL 등 굵직한 미국 선사가 세계 해운시장을 주름잡던 시대가 있었다.
‘USL(United States Lines)은 1921년부터 동부해안에서 대서양을 건너 유럽의 영국, 독일, 이태리까지 여객과 화물을 운송했던 해운사였다. 여객사업은 항공기의 등장으로 경쟁을 감당할 수 없어 1964년에 포기했고, 화물사업에만 주력했다. 당시 선박의 추진기관은 증기엔진이었는데 디젤엔진의 발명으로 신규 선박(디젤엔진)을 건조하는 과정에서 무리한 투자와 과도한 노선 확장으로 채무 부담을 견디지 못해 결국 1986년에 파산했다.
‘씨랜드(SeaLand Service Inc.)’는 1957년 10월 뉴욕항에서 보스톤항으로 컨테이너 운송 서비스를 세계 최초로 시작한 해운사였다. 재래선((General Cargo Vessels) 운항이 보편화되어 있던 그 당시에 ‘컨테이너’ 라는 규격화된 박스(Box)를 사용해 신속 정확한 해상 + 육상 운송의 새 장(場)을 열었다. 컨테이너를 사용함으로서 ‘항구에서 항구까지(Port to Port)’의 운송 개념을 ‘문(門)에서 문(門)까지(Door to Door)’로 해륙일관(海陸一貫) 운송의 획기적인 물류혁명을 이룩한 회사가 바로 ‘씨랜드’였다. 씨랜드는 한 때 세계 최고의 리딩 선사였으나, 해운시장의 장기불황으로 1999년 덴마크 선사, ‘머스크 라인(Maersk Lines)’에 합병되어 ‘머스크 씨랜드’가 되었다. 이후, 네델란드 선사, ‘P & O NedLloyd’와 추가로 합병하면서 ‘씨랜드’ 라는 이름은 사라졌다.
1938년 미국 정부는 적자에 허덕이던 ‘달러해운(Dollar Steamship Co.)’을 인수하여 회사명을 ‘APL(American
President Lines)’로 바꾸었다. APL의 선박은 미국 역대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다. APL은 1984년부터 대륙횡단 철도에 ‘2단적 철도운송(Double-Stacking Train Service)’을 최초로 시작했다.
컨테이너를 2단(2배의 무개)으로 싣게 되니, 기존의 철도 지반(Railway Ground)과 다리 교각(Bridge Piers)을
강화하고, 모든 Tunnel(터널)의 높이도 더 높이는 등 철도 시설을 재건하는 투자가 만만치 않았다.(철도회사들이 영세하므로 APL해운이 선투자를 한 셈이다) 1993년엔 LA항에 APL 전용터미날을 신축했고, 1994년엔 시아틀항에도 APL 전용터미널을 신축했다. 문제는 엄청난 투자에도 해운 시황이 따라주지 않자 회사는 금융 부담이 커지기 시작했다. 결국 APL은 1997년에 싱가풀해운 ‘NOL’에 매각(2억8500만달러)되어 합병되었다. 매각 조건엔 회사명과 선박이름(Logo)은 그대로 유지하고, 승선 중인 미국인들도 계속 고용하기로 했다. 만일 미국이 비상, 또는 전시 상황일 때, 전쟁물자를 운반할 선박을 우선적 사용하는 조건도 명시되었다. 2016년 APL을 인수한 NOL(싱가폴)도 90%의 주식이 ‘CMA CGM(프랑스 해운)’에 의해 인수되었다.
미국은 현재 국적선사가 없지만, 엄청난 물동량이 수출입되고 있기 때문에 거대한 해운 수요를 바탕으로
시장지배적 위치에 있다. 실제로 미국은 최대의 물동량을 무기로 글로벌 해운시장을 좌지우지하고 있기
때문에 자국의 해운사가 없어도 해상운송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미국은 제도적으로 연방해사위원회(FMC)를 설치해 외국 선사들의 운임 담합이나 불공정 거래 등 해운에 관한 규제와 감독업무를 수행하면서 자국의 수출입업자들이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철저한 감시를 하고 있다.
미국의 해운사들이 사라진 후 글로벌 해운시장은 유럽 해운사들과 아시아 해운사들로 장악되고 있다. 유럽 해운사들은 주로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지 확대처럼 인수합병을 통해 몸집을 키웠으며, 아시아 해운사들은 경제성장과 국가적 보호와 지원 하에 성장하게 된 셈이다. 미래에 만약 ‘자국 우선주의 정책(MAGA)’을 표방하는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 선다면 미국적 해운사들이 재탄생할까? 글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