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융통성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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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융통성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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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미 록밴드의 보컬리스트 ‘밀젠코’가 신곡 ’트러스트 인 러브’를 발표했다. 신곡을 소개한 뮤직비디오를 찾아보니 촬영지가 낯익었다. 샌피드로 언덕에 있는 ‘우정의 종각’이다. 뮤비에는 만국기가 펄럭이는 가운데 한국의 궁중무용도 등장하고 전통 남성한복을 입은 그가 대형 범종 옆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서울 마포구에서 한국과 코스타리카 국교 수교 60주년 기념으로 4만5000스퀘어피트 규모의 ‘마포광장’을 수도 ‘산호세’에 조성키로 했다고 한다. ‘마포’는 가요 ’마포종점’으로도 유명하다. "밤 깊은 마포종점, 갈 곳 없는 밤 전차(電車)~”로 시작하는 노래다. 가사 중간에는 여러 지명들이 들어있다. '강 건너 영등포’, '당인리 발전소', '여의도 비행장’도 등장한다. 마포는 청량리나 동대문, 돈암동 쪽에서 출발한 전차가 마지막으로 도착하는 종점이 있는 곳이다. 예전의 마포는 새우젓 배들이 드나드는 포구(浦口)였다. 지금도 마포 인근에 맛집이나 오래된 노포(老鋪)들이 많은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니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 '은방울 자매’는 한 가지 특색이 있었다. 쇼 공연무대나 방송출연시 한복만 입고 등장했다. 며칠 전 한국의 차기 대통령 선출 후 대만 외교부의 소셜미디어 공식 계정에 올라온 내용도 눈길을 끈다.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국민지도자를 선출한 한국 국민들에게 축하의 뜻을 전한다”며 게시된 글 상단에 한복을 입은 캐릭터가 그려진 포스터가 올라왔다.


위의 몇 가지 소식 중 공통점을 보니 예외 없이 한복이 등장한다. 그간 해외에서 한복하면 여성한복은 많이 알려져 왔다. 반면 남성한복은 다소 생소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밀젠코’가 입고 나온 뮤비 속 남성한복도 새롭게 다가온다. 여성한복이 본격적으로 뮤비에 등장한 것은 70년대 중반이다. 일본 가요계 진출 선두주자였던 이성애(李成愛)를 통해서다. 그녀가 부른 ‘가슴 아프게’가 공전의 히트를 하면서 함께 입고 나온 한복도 덩달아 인기를 끌었다.


요즘 한복을 포함해 다양한 ‘K-문화 콘텐츠’ 열풍이 뜨겁다. 며칠 전 LA타임스 1면에 “한국의 문화, 세계를 사로잡다”라는 타이틀의 기사가 게재됐다. 영화, 드라마, 음식, 의상, 한글, K-Pop 등 다양한 분야에서 볼 것과 즐길 것의 한국문화 콘텐츠가 바이러스처럼 급속히 퍼져 나가고 있다는(Spread virally) 얘기다. 얼마 전 작고한 한국의 석학(碩學) 이어령 선생이 펴낸 책(『문풍지, 한복, 융통성』) 에 한국문화의 정체성에 대한 예리한 분석이 있다.

 

"같은 동아시아권 문화에 속하면서도 한국과 일본은 정밀함에서 대립을 보인다. 한국에서는 적당히 문을 짜서 달기 때문에 틈이 생기면 문풍지로 막는 융통성을 발휘한다. 이는 한 치 두 치를 꼼꼼히 따지는 정확성보다는 ‘융통성’에 중점을 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똑같이 창호지로 바른 문을 사용하지만 우리처럼 문풍지라는 것이 없다. 문을 닫으면 한 치의 오차 없이 꼭 들어맞도록 되어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한복 바지, 버선, 그리고 되질, 말질 등 모두가 치수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의 멋이라는 것이 어느 면에서는 약간의 ‘비규격’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한국의 문화는 재고 따지고 계산하는 자의 문화와 양극을 이루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서양의 양복바지를 입어보면 기능성이 강조됐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게 된다. 정확하게 허리 둘레의 치수를 재어 허리춤에 꼭 맞도록 만든다. 반면, 한복바지를 만든 전통적인 한국인의 눈으로 보면 서양 사람의 양복바지처럼 불편한 것도 없다. 원래 인체의 허리 부분은 밥 먹을때 다르고 굶었을 때 다르다. 아무리 치수를 정확하게 재서 만든 옷이라도 사람의 몸은 물질이 아니라 생체이기 때문에 정확히 자로 잴 수가 없는 것이다.”


지난 일요일 밤 LA에서 열린 제27회 크리틱스초이스(Critics Choice) 시상식에서는 ‘오징어게임’의 배우 이정재가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오징어 게임’은 외국어 시리즈 작품상까지 획득했다. 한복을 비롯한 세계적으로 각광받는 ‘K-콘텐츠 창작(創作) 파워’의 바탕에도 이런 한국문화의 특징들이 스며 있는 것은 아닐까. 때로는 치수를 무시하고, 비규격의 파격을 넘나들면서 상상의 틀을 확장해 나가는 '융통성의 힘'을 한국문화의 창의성, 확장성으로 짚어 낸 이어령 선생의 혜안이 감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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