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광의 행복칼럼] 그리스도인의 성찰과 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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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광의 행복칼럼] 그리스도인의 성찰과 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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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쉐어USA 대표


목회자 필독 기독교 고전을 소개해 달라는 요청을 받으면 암브로시우스의 <성직자의 의무>와 크리소스톰의 <목사직에 대하여>를 말한다. 암브로시우스는 후배 목회자를 위해 <성직자의 의무>를 저술했다. 크리소스톰은 목사가 되기 전 28세에 친구 바실과 나눈 대화를 엮어 <목사직에 대하여>로 출판했다. 크리소스톰은 바실과 같이 안수를 받기로 했다가 도망을 갔다. 홀로 안수를 받고 찾아와 하소연과 울분을 토하는 바실에게 전한 ‘목사가 가야 할 길’이다. 

   

암브로시우스는 키케로가 아들을 위해 쓴 <의무론>의 틀을 활용해서 고전 철학과 윤리를 기독교적으로 재해석하고 성경을 근거로 <성직자의 의무>를 썼다. 암브로시우스가 아들같은 후배 목회자들을 위해 쓴 책이다. 이 책은 목사에게 필요한 품성과 덕행을 제시한다. 일반 성도의 윤리를 제시한다. 그래서 이 책을 기독교 윤리서라고 부르기도 한다. 

   

교회사에 많은 목사론이 등장하지만, 두 사람의 목사론이 중요한 것은 목사직에 대한 그들의 성찰과 숙고가 돋보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공히 목사가 되기 전 인문학을 탐구했다. 그들은 인문학적 소양으로 성경을 읽고 목사직에 대한 통찰력을 가졌다. 그들은 목사 안수를 주저했었다. 크리소스톰은 안수를 피해 도망을 다녔고, 암브로시우스도 갑작스런 제안에 안수를 고민했었다. 

   

현대 교회가 영향력을 상실한 이유를 교회의 품격 상실로 진단하는 사람이 많다. 현대 기독교가 품격을 잃은 이유를 한마디로 정리할 수는 없겠지만 성숙한 신앙에 필요한 숙고와 성찰의 부재를 고민해야 한다. 속도를 숭상하는 현대에 숙고나 성찰이 사라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로 치부되기도 한다. 

   

그러나 숙고와 성찰은 바쁜 현대에 더욱 필요하다. 숙고는 미리 생각하고 준비하는 시간 갖기라면 성찰은 사후에 되돌아보며 평가하는 것이다. 암브로시우스와 크리소스톰은 평신도 시절에 목사직에 대해 숙고했다. 아울러 그들은 목사가 된 후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 그들은 숙고와 성찰로 기득권을 과감히 내려놓았고 필요하면 로마 황제들에게 과감하게 도전했다. 

   

성찰과 숙고는 목회자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가치 있는 삶을 지향하는 사람은 누구나 숙고와 성찰의 삶을 살아야 한다. 중요한 일을 올바르게 감당하려면 꼭 필요한 것이 숙고와 성찰이다. 그러므로 지도자들은 반드시 숙고와 성찰이 필요하다. 현재 우리 사회의 난맥은 숙고와 성찰 부재에 대한 부작용이다. 숙고 없는 계획과 실행, 성찰 없는 해석과 정리는 고통을 낳는다.

   

삶의 중대한 실수의 반복을 피하려면 숙고와 성찰이 필요하다. 숙고와 성찰은 자기를 객관하고 냉철히 자기를 살피는 것이다.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검토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The unexamined life is not worth living)”라고 했다. 숙고와 성찰의 강조다. 일상에서 성찰과 숙고가 필요하다면 주님을 섬기는 일에 숙고와 성찰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숙고와 성찰로 삶과 사역을 살폈던 암브로시우스와 크리소스톰 둘 다 스스로 가난과 고난을 선택했다. 귀족 출신의 고위 공직자 암브로시우스는 목사가 될 때 전 자산을 가난한 자를 위해 헌금하고 청빈을 선택했다. 세계 최대 교회 담임 목회자로 취임한 크리소스톰은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청빈을 실천했다. 숙고와 성찰의 열매는 겸손과 신실함이다. 성찰과 숙고로 삶이 익어가는 가을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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