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오래된 새로움, 두 얼굴의 진실
이우근
변호사 / 숙명여대 석좌교수
1월은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Janus)의 달이다. 그 두 얼굴은 이중인격이 아니다. 오히려 인격의 진실을 나타낸다. 선과 악을 함께 지닌 양면의 인간성만이 아니다. 무릇 삶과 역사의 진실은 양면성을 지닌다. 사랑과 정의, 자유와 책임, 빛과 어두움, 좌절과 희망이 함께 어우르는 것이 삶의 진실이다.
음정양동(陰靜陽動)…. 동양사상은 음양의 조화를 우주의 근본원리로 본다. 서로의 차이는 상쟁(相爭)이 아니라 상생(相生)의 바탕이 된다. 지난날을 돌아보는 보수의 얼굴과 앞날을 내다보는 진보의 얼굴, 그 두 얼굴 사이에 ‘지금 여기’(hic et nunc)가 있다. 그 '지금 여기'의 시작이 새해 첫 달 1월이다.
진리의 전당인 대학(University)은 하나(unus)와 여럿(versus)의 결합체다. 서로 다른 것들이 하나의 세계 안에서 공존하는 ‘다양성 안의 통일성’이 진리라는 뜻일 터이다. 새로움은 어디서 오는가. 구닥다리 옛것에서 파릇한 새싹이 돋는다. 김치·된장·고추장·치즈·요구르트…, 오래 묵히고 삭힌 최고의 발효식품이다. 아무리 새로운 것이라도 세월이 흐르면 낡고 썩기 마련이지만, 발효된 옛것은 썩는 법이 없다. 언제나 새로운 숨결로 살아있다.
역사는 어제의 들숨과 오늘의 날숨이 만나 내일의 숨길을 여는 생명의 흐름이다. 그 생명의 흐름은 정신의 발효를 잉태한다. 오래도록 묵히고 삭힌 고전(古典)이다. 해묵은 고전의 뿌리에서 진보의 새잎이 돋아나고, 그 잎이 다시 떨어져 새로운 싹을 틔우는 부활의 자양분이 된다. 거듭난 보수, 발효된 진보… ‘오래된 새로움’의 탄생이다. 인간과 세계의 내면을 깊이 성찰한 퇴계 이황은 옛 현인들이 걸은 지혜의 옛길을 드높이 기렸다. “옛사람도 나를 못 보고 나도 옛사람을 못 보지만, 그들이 거닐던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어찌 아니 걸으랴.”(도산십이곡 중)
옛것을 존중하는 보수와 새것을 사랑하는 진보는 대립적이지만 결코 적대적인 것은 아니다. 보혁(保革)의 싸움은 가없는 역사의 지평에서 바라보면 드넓은 대양 속 한낱 포말(泡沫)처럼 부질없는 한바탕 소동에 지나지 않는다. 성장의 필요가 소외계층의 아픔을 외면하는 구실이 될 수 없고, 평등의 이념이 가진 자를 난도질하는 도그마의 칼날로 번득여서도 안 될 일이다. 외적의 침입보다 더 위험한 것이 공동체의 밑동을 안에서 갉아 먹는 내부분열이다. “국가는 자살로만 망한다!” 에머슨의 촌철살인은 시답잖은 익살이 아니다. 엄숙한 진실이다.
칼 포퍼는 “마르크시즘은 협력할 동반자를 찾는 대신에 공격할 적을 찾는다”고 비판했다. 나치즘‧파시즘‧마르크시즘‧마오이즘‧주체사상…, 모든 전체주의는 자신을 절대선으로, 반대세력을 절대악으로 규정한다. 권위주의 독재보다 더 사악한 것이 하나의 얼굴만을 강요하는 근본주의 이념의 독선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탈리오 법칙을 그대로 실천한다면, 세상에는 소경과 이빨 빠진 사람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오만한 정의를 꾸짖는 간디의 통찰이 섬뜩하다.
특정 이념에 중독된 권력은 반대편을 궤멸시켜야 할 적폐로 몰아세운다. “인간은 자기의 선 때문에 더 악해질 수 있다.” 종교사학자 자크 엘륄의 경고가 날카롭다. 독선적 권력의 선동에 마냥 놀아나는 군중은 레닌의 말처럼 ‘쓸모 있는 바보들’에 지나지 않는다. 자유는 진실의 영토에서만 자라난다. 위선과 도그마의 토양에서는 자유가 꽃필 수 없다.
하나의 얼굴만을 강요하며 사회통합을 깨뜨려온 독선과 증오의 옛 구호들은 이제 진실과 화합의 새 목소리로 바뀌어야 한다. 국민의 기본권, 나라의 안보, 자유민주의 헌법체제 등 국가정체성의 본질적 영역에서는 모두가 일치를 이루되, 그 밖의 비본질적인 영역에서는 각자가 자유를 누리면서, 서로 다른 얼굴을 지닌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화합을 이뤄가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한다. 신학자 멜데니우스의 호소로 새해 첫 달을, 두 얼굴의 야누스를, 그 ‘오래된 새로움’을 맞는다.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그리고 모든 것에서 사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