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등] ‘공멸(共滅)’에서 ‘상생(相生)’으로
이보영
평통 통일전략 전문위원
학창시절 농담처럼 사용했던 영어 조크가 생각난다. “You die, me die, all die!” 콩글리시이지만 뜻은 통한다.
“너 죽고, 나 죽자!” 어리석은 말같지만, 아주 무서운 말이다.
이 말은 인간관계에서 억울함이나 분노가 극에 달해 참기 어려울 때, 극단적으로 선택하는 벼랑 끝이다.
고대 중국 정나라 사상가, 열자(열자)란 사람의 책에 ‘동귀어진(同歸於盡)’ 이라는 고사가 나온다.
적(敵)과의 싸움에서 전력차이가 너무 커서 도저히 어찌할 수 없거나, 극단적 상황에 몰리면 나 자신은 물론 상대방과 함께 죽는 전략이다. “상대방과 동반 죽음으로 간다”는 의미로, 공멸(共滅)을 뜻한다.
중국 무협소설에서나 자주 등장하던 구절, ‘동귀어진’은 선거전이나 파업현장에서도 흔히 사용된다.
선거전에서 특정 정당 후보를 낙선시키기 위해 선거에 출마해서 그의 득표를 분산시키므로 ‘동반낙선’을 꾀하는 물귀신 작전이나, 파업쟁의에 임하는 노조원들이 비장한 각오로 ‘노조도 회사도 같이 죽자’ 는 식의 ‘동반공멸’을 위협하는 경우들이 동귀어진이다.
“너 죽고 나 죽자”라는 말은 조직 폭력배나 깡패들 사회에서 막가파들이 흔히 쓰던 위협적 공갈이었는데, 국제적으로 고립된 북한이 핵(核)을 무기로 ‘너 죽고 나 죽자’ 라는 막가파 배짱으로 나오고 있다.
핵(核)의 발견은 인류의 탁월한 과학적 성과물이기도 하지만, 인류의 존립 자체를 위태롭게 하는 파멸의 무기가 되었다. 핵이 폭발할 때 발생하는 고열과 충격파, 방사능 물질은 주변 수십킬로미터를 초토화시킨다.
핵전쟁은 전쟁 당사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핵폭발로 기후와 토질을 변화시켜 인류와 생물을 공멸시킨다.지구상엔 약 12,000개의 핵폭탄이 존재하고, 이중 약 3,700개가 실전에 배치되어 있다는 통계가 발표됐다. 자칫 누구하나 실수로 핵버튼을 누른다면 그 결과는 돌이킬 수 없는 초대형 참극이 발생한다.
미국의 과학국제안보연구소(ISIS)에 따르면, 2022년 말 북한은 약 45기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ISIS는 북한의 풀루토늄과 고농축 우라늄 생산량을 토대로 핵무기 수를 추정한 것이다.
이런 북한에 대응해 한국도 핵을 개발, 보유해야 한다는 ‘자체 핵무장론’ 주장이 크게 대두되고 있다. 최근 실시한 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한국인의 71%는 자체 핵무기 개발에 찬성하고 있다.
사실 한국은 핵으로 인해 큰 수혜(受惠)를 받았다.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미국이 투하한 두발의 원자폭탄은 일제 식민지배에서 한국을 해방시켰다. 또 다른 혜택은 자원이 빈약한 한국에게 원자력은 중공업 육성에 생명의 빛이 되었다.
일본은 우리와 반대적 입장이다. 1945년 두 발의 원자폭탄으로 하루 아침에 패전국이 되었다. 1954년엔 태평양에서 조업 중이던 일본 참치어선이 미국의 수소폭탄 실험에 피폭되는 참사를 겪었다. 당시 일본 어선에는 23명이 조업중이었다. 2011년엔 동일본 해상지진으로 후쿠시마 원전이 폭발하는 대형사고를 겪었고, 지금까지도 그 여파가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일본 국민은 핵에 대한 공포와 피해의식을 상당히 갖고 있다.
핵전쟁에는 승자가 있을 수 없다. 모두가 패자일 뿐이다.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전개돼 온 핵억제의 기본적 논리는 상호 방어가 불가능해 인류에게 공멸의 결과를 초래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핵전쟁은 억제되어 왔다.
며칠 전 한국과 북한은 군사적 긴장완화를 위해 2018년에 체결한 ‘9.19 군사합의’ 효력을 완전히 정지시켰다. 이는 북한이 11월 21일 우주로 정찰위성을 성공적으로 발사했다는 뱔표로 시작됐다. 따라서 한국도 묶여왔던 ‘9.19 군사합의’ 효력을 정지시킨다는 선언을 선제적으로 발표했다.
북한이 미사일 발사 중단이나 비핵화에 진전이 없는데, 왜 우리만 9.19 군사합의에 묶여서 안보태세가 느슨해 졌던 것을 오히려 이번 기회에 바로 세워야 할 것이다.
한국은 북한에 비해 월등한 성능과 기동(機動)을 갖춘 해, 공군이 완충구역에서 실전훈련과 정찰활동을 재개했다. 이에 맞서 북한은 휴전선에 병력과 신형장비들을 전진배치할 것이라고 위협을 가했다.
어떤 도발이던지, 사전에 도발로 인해 득(得)과 실(失)을 따져서 실(失)이 크다면 절대 도발하지 못한다.
평화는 ‘힘의 우위’ 즉, 군사력, 경제력, 외교력이 월등할 때 지켜진다.
사람도 국가도 홀로 살 수 없는, 공동체 속에 공생하며 사는 존재다. 공생은 서로 상대의 체면과 입장을 고려하며 세워주는 삶이다. 한 쪽은 명분을 취하고 다른 쪽은 실리를 얻는다면 윈–윈이 되는 것이다.
마음을 조금 더 크게 열고, 제3의 대안이 있겠다는 긍정적 생각만 갖는다면 가능한 길은 찾을 수가 있다.
핵으로 국제사회를 위협하고, 체제와 사상으로 인권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자세로는 결코 오래 갈 수 없다. ‘세상이 열려서 시대가 변했다는 것’을 이젠 민초들도 알기 시작했다.
성서에도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고 경고하고 있다. ‘공멸(Die–Die Game)’에서 ‘상생(Win–Win Game)’으로 가는 길을 모색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