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데모크레이지
이 우 근
변호사 / 숙명여대 석좌교수
민주주의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다. 독재권력이나 군사쿠데타 때문이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그런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대중영합주의의 고착화에 따른 정치의 타락 현상이다. 포퓰리즘 사랑에는 여야가 따로 없다. 선거 때 표만 된다면 어떤 공약이든 마구 뿌려댄다. 공약의 타당성·가능성 따위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선거가 끝나고 나면 그뿐, 공약의 이행에는 관심조차 없다. 애당초 이행할 수 있는 공약도 아니었다.
정치인들이야 으레 그렇다지만, 유권자도 선거공약의 진실성을 믿지 않을뿐더러 그 이행을 바라지도 않는다. 자기가 지지하는 정치인이라면 그 실체가 어떻든, 그 공약이 무엇이든 묻지 않고 표를 던진다. 표피적 감성을 자극해 표를 낚아채는 포퓰리즘의 먹잇감일 뿐이다. 모택동의 선동에 놀아난 홍위병들은 문화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반문화적 광란극을 벌였다. “민주주의가 타락하면 우민(愚民)정치가 된다.” 2400년 전, 민주주의 발상지 그리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외친 경고다. 그때나 지금이나 대중심리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대중영합주의는 지역이기주의와 민족주의, 그 두 날개로 정치의 현실세계를 휘젓고 날아다닌다. 지역갈등은 어느 때보다도 깊어졌다. 자기 지역 사람이나 그 지역에 아부하는 후보에게 아낌없이 표를 내어준다. 각 정파는 숱한 선전기구를 동원해 대중의 이기적·감각적 욕구를 채워주느라 정신 차릴 틈이 없다. 진실과 양심은 실종되고 역사의식과 공동체정신도 증발한다.
민족감정은 아슬아슬하기 그지없다. 대중영합적인 민족우월의식에서 파시즘·나치즘이 싹텄고, 스탈린과 모택동의 공산주의 독재체제가 무르익었다. 그 전체주의를 거부하는 민주체제에서 민족주의 포퓰리즘이 득세하는 현실은 모순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숱한 군사도발을 감행하면서 핵무기와 미사일로 우리를 위협하는 북한을 ‘같은 민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껴안으려는 정치세력이 대중심리를 쥐락펴락한다. 같은 민족이 아니라서 북한이 6‧25 남침을 했던가?
북한 정권은 스스로를 ‘김일성 민족’이라 부른다. “우리 민족은 수령을 시조로 하는 김일성 민족이다.” 평양방송의 내용이다. 국가안보에 중대한 위협으로 현존하는 세습독재의 실체는 아랑곳하지 않는 정치꾼들이 안보를 걱정하는 이들에게 전쟁광‧반민족분자의 낙인을 찍어댄다. 안보를 포기한 땅에서 민주주의가 숨 쉴 공간이 있을 리 없다.
대중영합주의는 민주주의를 안에서부터 무너뜨린다. 민족 앞에는 우방도 동맹도 없다. 지역 앞에는 이념도 가치도 존재하지 않는다. 내 민족이 최상의 이념, 내 지역이 최고의 가치다. 대중의 감성에 아부하는 정치는 민주주의(democracy)가 아니다. 데모크레이지(democrazy)로 전락할 뿐이다. 광민(狂民)으로 밖에는 번역하지 못할 슬픈 용어다. 숱한 범죄혐의에 휩싸인 정치인을 우상처럼 떠받들며 비판자들에게 온갖 욕설과 협박의 막말을 퍼붓는 무리를 달리 어떻게 부를 수 있을까? 데모크레이지는 책임 없는 자유주의, 증오와 분열의 언어, 전통과 역사를 뒤엎으려는 사명의식으로 무장하고 헌법초월의 혁명을 꿈꾼다. 대중은 그 동원수단에 불과하다. 헝가리 태생의 미국 역사학자 존 루커스는 20세기 민주주의의 가장 큰 적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포퓰리즘에 뿌리박은 민족주의라고 진단했다. 민족주의 포퓰리즘은 동원된 군중의 힘으로 ‘다수의 독재’를 추구하면서, 가짜뉴스를 퍼뜨리고 사실 왜곡과 증거조작을 일삼으며 헌법 체제를 무력화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의 싸움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냉전보다 더 위험하고 치열하다. 민족주의는 정치·경제·문화의 차원을 넘어 인간 정신을 지배하는 도그마의 우상으로 자리 잡는다. 심지어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라는 사법의 영역마저도 법리와 양심에 눈감고 ‘단일 민족’과 ‘반(反)외세’를 외치는 민족지상의 포퓰리즘에 무릎 꿇는다. 이성을 거부하고 합리주의를 해체하려 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는 그래도 문화적이고 점잖은 편이었다. 광기의 데모크레이지가 활개치는 포스트-트루스(脫眞實) 시대보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