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률 칼럼] 태양은 가득히
코로나19로 인해 줌으로 강의한 지 벌써 이년이 다 돼 간다. 이렇게 오래 갈 줄은 아무도 몰랐다. 줌으로 강의하다 보니 여러 예상치 못한 일들이 생긴다. 엘리베이터에서 누가 인사를 건네면 누구시냐고 묻게 된다. 수강생이라는 대답에 머쓱해진다. 줌으로 하는 강의, 학생들은 내 얼굴과 연구실만 보게 된다. 다들 줌 화면에 비치는 내 얼굴 뒤에 있는 영화포스터에 대해 궁금증이 많았다. ‘태양은 가득히’다. 어떤 학생은 카톡으로 물어 온다. 무슨 사연이 있어 특정 영화 포스터를 붙여 두었는지 궁금해 한다.
순간 나는 까마득한 과거로 돌아가게 된다. 어린 시절, 내가 살던 도시에는 영화관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인 아카데미 극장이라는 영화관이 있었다. 그 극장을 기억하는 것은 알랭 드롱이 등장하는 영화 ‘태양은 가득히’가 한몫했다. 윗도리를 벗어 젖힌 채 요트 키를 잡고 있던 모습은 어린 나에게도 엄청 멋져 보였다. 십대의 어느 날이다. 나는 언젠가 알랭 드롱이 파국을 맞았던, 이태리 소렌토, 아말피 해변을 가보리라고 굳게 맹세했다.
세월이 흘러 막상 TV를 통해 다시 보게 되었을 때 주인공에 대한 연민으로 영화는 더욱 새로워졌다. 르네 클레망 감독. 영화는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가난한 청년 톰 리플리가 부자 친구 필립의 아버지로부터 이태리에서 방탕한 생활에 빠져 있는 아들을 미국에 데려오는 조건으로 거금을 받기로 한데 시작한다. 반전과 서스펜스가 이어진다. 누벨바그에 대한 도전쯤으로 여겨지면 20세기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영화인들의 주목을 받아 99년 앤쏘니 밍겔라가 감독하고 맷 데이먼과 기네스 팰트로가 등장하는 ‘리플리’라는 제목으로 다시 만들어진다. 뿐만 아니다. 몇 년전 한국에서는 ‘미스 리플리’라는 MBC 드라마까지 등장했다.
세 영화 모두가 야망을 채우기 위하여 수단을 가리지 않는 굴절된 가난한 청춘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영화가 주는 충격이 워낙 커 ‘리플리 증후군’이란 정신병의 새로운 학명까지 등장하게 된다. 허구의 세계를 진실이라 믿고 거짓된 말과 행동을 상습적으로 반복하는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뜻하는 용어다. 바로 이 영화에서 비롯되었다. 세 영화의 걸개는 비슷하지만 그래도 오리지널이 단연 압권이다. 지중해와 소렌토, 아말피, 포지타노 일대의 아름다운 풍광을 담은 영상미는 언제 봐도 아름답다. 게다가 니노 로타의 음악이 워낙 좋았기 때문이다.
코로나가 없었던 이년전 여름방학, 나는 보름동안 이태리에 있었다. 세미나가 끝나고 귀국을 늦춰 나홀로 이태리를 돌아다녔다. 홀로 찾은 소렌토, 아말피 여행은 감미로웠다. 이글거리는 태양과 땀내나는 욕망 등등 영화속의 풍경이 생생하게 다가왔다. 슬프게도 십대의 꿈을 중년이 되어 이룬 셈이다. 그러나 재정 위기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태리는 우리가 상상한 모습보다 많이 심각했다. 대도시에는 쓰레기가 넘쳤다. 대부분의 버스에는 냉방되질 않아 찜통더위에 숨이 턱턱 멎는다. 과거 로마제국의 영광은 간데없고 시끄럽고 혼란스럽다. 놀랍게도 관광버스조차 생수병을 둘 컵걸이조차 없어 내내 들고 있어야 했다. 음료수를 쏟을 경우 청소하기 번거로워 컵 걸이를 부착해 두지 않는다는 버스 기사의 설명이다. 할 말을 잊었다. 안전벨트도 엉망이다. 한국과 일본에 비해 많이 다른 풍경이다.
반대로 한국인 현지 가이드의 목소리는 힘이 넘친다. 한국이 잘 살게 되면서 엄청난 숫자의 한국인들이 이태리로 쏟아져 온다고 했다. 이태리 사람들이 서울에 오면 세 번쯤 놀라 뒤로 자빠진다고 한다. 공항의 쾌적함에, 어디든 빵빵터지는 와이파이에, 28인승 넓고 편안한 관광버스에 놀라 기절한다는 것이 현지인 가이드의 의기양양한 설명이다.
휘청거리는 이태리, 과도한 복지정책에다 정책실패로 인한 재정위기가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포퓰리즘이 얼마나 무서운 지 실감하게 된다. 오늘 이태리를 생각하면서 우리를 돌아보게 된다. 앞뒤 가리지 않고 세금 퍼붓는 식으로 무리한 정책이 난무하고 있다. 나랏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는데 대선을 앞둔 정권은 돈 뿌릴 궁리만 한다. 오늘 나는 문득 두렵다. 부모님 세대들의 피땀과 우리 세대의 희생으로 이룩한 이 나라의 산업화와 민주화가 거덜날까 불안한 것이다.
김동률 칼럼니스트: 서강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고려대를 졸업했다. 사우스캐롤라이 매체경영학 박사를 했다. KDI 연구위원, 영화진흥위원, EBS 이사, 공기업 경영평가위원 등을 역임했다. 한국의 주요 일간지에 기명칼럼을 연재했으며 휴머니즘에 바탕을 둔 유려한 문장과 설득력 있는 글로 사랑을 받아 왔다. 그의 에세이는 한국의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게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