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에게 덕(德)을 베풀면 돌려받을 수 있을까?”

필자는 여의도에서 은행 지점장으로 있을 때 “그렇다”는 경험을 했다. 직원이 거액 정기예금을 한 고객을 소개했다. “고맙다”고 인사하자 예금주는 “아버지가 갔다 오라고 해서요”라고만 답하고 돌아갔다. 직원은 “지점장님 성함을 대며 8억원 축하 정기예금을 하신다길래 아는 분인 줄 알았다”고 했다. 예금원장을 살펴봤으나 전혀 모르는 이였다. 흔치 않은 일이지만 궁금해 이튿날 과일 바구니를 들고 주소에 적힌 창신동 예금주 집을 찾아 나섰다.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꼭대기에서 어렵게 찾은 그 집은 길에서 집안이 훤히 들여다 보였다. 문을 밀고 들어서자 백발의 예금주 아버지는 “둘째 도련님을 똑 닮으셨다”며 반겼다.

그는 다리를 모은 채 가노(家奴)였던 집안 내력을 얘기했다. “해방된 뒤 마님이 우리만 따로 불러 패물을 주시며 ‘마을을 떠나 멀리 가서 여기 돌아보지 말고 편하게 살라’고 하셨습니다. 마님 친정에서 따라온 노비여서 특별히 챙겨주셨지요.” ‘마님’ 호칭을 계속 쓰는 그는 필자 할머니의 당부대로 서울로 와 개명한 뒤 평생 백정 일을 하며 살았다. “어느 날 마님이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도련님 안부를 물었으나 더 먼저 작고했다고 합디다.” 자손 중에 은행 지점장을 한다길래 축하예금을 하라고 아들에게 시켰다는 것이다.

필자의 할머니가 베푼 덕은 당대와 2대를 넘어 3대인 손자 대에 이르러 되돌아 왔다. 3000가지 선행(善行)을 해 수명을 21년 늘린 중국 명나라 원료범(袁了凡)이 음즐록(陰騭錄)에 쓴 ‘운명개척’에 나온 내용대로였다. ‘음즐’은 “하늘이 아무도 모르게 사람이 행하는 것을 보고 화와 복을 내린다”는 뜻이다. 서경(書經)에 나온다. 음덕(陰德)을 쌓으면 하늘이 반드시 그것을 지켜 보았다가 복을 내리고, 나쁜 짓을 하면 그것을 보아 두었다가 흉보(凶報)를 내린다는 외천(畏天)사상을 말한다. 내가 겪는 이 큰 어려움도 내 선대 어느 분의 악행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내가 나쁜 짓을 하면 나의 다음 대나 손주 대에 가서도 그 화가 미칠 수도 있다는 거다.

따지고 보면 그 예금 실적은 필자의 실력이나 기술에서 나온 게 아니라 운(運)이다. 운은 마님의 덕을 입은 예금주 아버지에서 비롯됐다. 모른 척해도 될 일이었는데도 그는 애써 덕을 베푼 손자까지 찾아내 덕 갚음을 한 거다. 그를 그렇게 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한 할머니의 진심이 그에게 통했기 때문이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세계적인 기업들의 성공은 70~80%가 기술보다 운이었다는 연구도 있다. 모든 기업이 영원불멸을 꿈꾸지만 평균 수명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매켄지 조사로는 1935년에는 90년이었으나, 1975년에는 30년, 1995년 22년, 2019년 15년 이하다. S&P500지수에 편입된 기업의 평균 수명도 1961년에 60년, 2020년에는 18년으로 줄었다. 대한상공회의소의 조사로는 한국 코스피 상장회사 686개의 평균 수명은 32.9세다. 1000대 기업의 평균 수명은 28년이다. 수명이 짧아진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고객이 등 돌린 기업은 모두 결국 살아남지 못했다.

장수기업의 비밀은 톰 피터스가 초우량기업에서 찾아냈다. 첫째는 직관경영, 둘째는 동기부여고 셋째가 조직관리다. 짐 콜린스도 7000개 넘는 기업의 데이터를 조사해 위대한 기업의 특징은 사업 포트폴리오를 지속해서 확대 재편하며 경쟁력을 확보한 데 있다고 주장했다. 경쟁력의 비밀은 변신력이고, 변신력은 고객만족에서 나오며, 고객만족은 직원만족에서 나온다. SNS처럼 즉답을 내놓지는 않더라도 꾸준하게 덕을 쌓 듯 고객에게 다가선 기업만이 성공해왔다. 코로나 사태로 모두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괄목할 실적을 올리는 기업은 한결같이 고객 재탐구에서 길을 찾고 있다. 그렇게 쌓인 노력은 운으로 포장돼 성공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조성권 칼럼니스트: 국민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숭실대학원에서 벤처중소기업학으로 경영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우리은행 홍보실장, 예쓰저축은행 대표를 지냈다. 현재, 국민대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사)미래경제교육네트워크 이사, 학교법인 영신학원 감사, 멋있는삶연구소장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