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굽은 나무, 곧은 먹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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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근 칼럼] 굽은 나무, 곧은 먹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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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우 근 

변호사/ 숙명여대 석좌교수

PEN.KOREA 인권위원장


국민을 '순수한 대중'과 '부패한 엘리트'의 두 계급으로 나누는 정치집단은 엘리트 계층에 대한 대중의 원초적 분노, 경제적·사회적 강자에 대한 약자의 본능적 증오를 정치의 밑거름으로 삼는 반면에, 국민을 '미개한 대중'과 ‘현명한 엘리트'로 나누는 정치세력은 미개한 대중을 지도·계몽하는 엘리트의 자질과 능력을 정치적 기반으로 삼는다. 그렇지만 모두 망상이다. 대중이 항상 순수하거나 미개한 것은 아니며, 엘리트도 늘 부패하거나 현명한 것은 아니다. 대중이 포퓰리즘의 선동에 휘둘릴 때, 엘리트가 위선과 오만으로 타락할 때, 대중도 엘리트도 모두 심각한 오류에 빠진다. 


민주국가에서 국민의 힘은 엘리트의 권력보다 강하고 건전하다. 다만 국민 다수가 대중선동에 휩쓸리지 않을 때만 그렇다. 정치집단이 거대한 선전기계가 되어 대중의 감성을 자극하고 선동을 일상화하면 나치즘·파시즘·공산주의 같은 ‘다수의 독재’로 귀결된다는 것이 역사학자 존 루커스의 경고다. 선거 때마다 튀어나오는 무상분배, 대규모 복지 따위의 선심 공약은 선거가 끝난 뒤에는 대부분 흐지부지되고 마는 거짓 공약들이다. 그것이 헛공약으로 끝나면 그나마 다행이다. 문제는 그 헛공약을 실제로 현실화하는 경우다. 나라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당장의 인기를 얻으려는 대중영합 정책은 결국 나라의 재정과 국민의 삶을 파탄상태로 내몬다. 


군중선동과 무상복지로 무장한 포퓰리즘은 다수 대중의 지지를 노리는 표(票)퓰리즘으로 변질되고, 표퓰리즘은 민주주의의 진실을 비웃으며 입법·사법·행정의 3권을 특정 정파의 손에 몽땅 내맡기는 '사법의 타락'으로 이어진다. 민주의 깃발로 민주주의를 능멸하고, 국민의 이름으로 국민주권을 농락하는 절대권력의 독재가 등장하는 것이다. 


법관은 ‘선출된 권력’이 아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처럼 국민의 직접선거로 뽑지 않는다. 국가의 자격시험과 전문적 법률교육을 거쳐 임용된다. 사법부의 민주적 정당성을 확립한다는 취지로 등장한 법관 선거제도는 주민의 압력 또는 무관심에 따른 대표성의 저하, 불투명한 선거비용 조달, 후보자의 당파성과 대중영합 현상, 유권자들과 법관 후보자 사이의 유착관계 등 숱한 부작용이 드러나면서 심각한 비판에 직면해 있다. 


권력분립은 독재자 1인의 폭정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가 아니다. 히틀러의 나치즘, 무솔리니의 파시즘, 스탈린의 공포정치, 모택동의 문화혁명은 모두 표퓰리즘으로 권력을 장악한 다수의 독재, 여론이 법률보다 앞서는 대중독재였다. 대중독재는 힘없는 소수자에게 희생과 불이익을 강요한다. 의회 다수의석을 차지한 정파가 행정권을 장악하고 사법권까지 움켜쥐는 대중독재를 막아내는 것이 권력분립원칙의 당면한 목표다. 대중독재는 유권자 다수의 지지를 받은 정파의 입법권 장악에서 행정권 독점, 사법권 탈취로 나아간다. 


입법부가 유권자 다수의 지지를 받은 정파의 지배 아래 놓이고 사법부가 그 입법부 앞에 무릎 꿇는다면, 결국 그 정파가 재판관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법률은 인간을 지배하고 이성은 법률을 지배한다'고 하지만, 이 시대의 사법이 과연 이성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지 정직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입법부와 행정부가 유권자 다수의 요구에 영합할 때, 사법부마저 그에 따른다면 소수자 보호는 꿈도 꾸지 못한다. 국민 다수의 지지로 선출된 독재정권을 그동안 얼마나 숱하게 경험해왔던가? 다수의 독재, 권력의 일탈… 그 반(反)민주의 쌍생아를 잉태한 표퓰리즘은 결국 사법의 타락을 낳는다. 


대중독재 앞에서 국민의 자유와 인권은 옛말이 되고 만다. "법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법 때문에 망한다." 시인 바이런의 명언이다. 민주주의의 생명은 권력의 분립, 사법의 철저한 독립에 있다. 사법의 독립은 정치권력에 의해 외부에서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사법부 내부에서 법관들 스스로 지켜야 하는 것이다. “목수는 나무가 굽었다고 먹줄을 굽히지 않는다.(繩不撓曲)” 법가(法家)의 한비자(韓非子)가 한 말이다. 목수는 나무를 탓하지 않는다. 쥐고 있는 먹줄을 곧게 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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