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수영의 마음산책] 감기와 우울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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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수영의 마음산책] 감기와 우울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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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수영

연세대 교수 / 한국상담진흥협회 이사장 


“우울증의 별칭이 뭔지 알지?” 캘리포니아의 한 가족치료 임상훈련기관에서 수련을 받던 유학시절, 내 수련감독이 던진 질문이다. 나는 갸우뚱 고개를 저어야 했다. 그가 친절하게 소개한 우울증의 별칭은 ‘영혼의 감기’(common cold of the soul)이었다. 나는 이 별칭의 숨은 의미를 파악하는 데, 꽤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했다.


일단 감기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감기는 흔한 질병이다. 때로는 계절마다 찾아오는 유행병처럼 여긴다. 감기의 여러 증상들이 우리의 일상생활을 불편하게 해도, 그 증상으로 생명의 위협감을 느끼는 경우는 적다. 내 할머니는 어린 시절 감기에 걸린 나에게 감기엔 묘약이 있다고 했다. 무조건 잘 먹고 잘 자면 그냥 낫는다고 했다. 가끔 독한 감기약을 먹으려고 하면, 말리시진 않았지만 웃으시며 건네신 말이 기억에 남는다. “수영아, 감기약 먹으면 7일 만에 나을 것이고, 약을 먹지 않아도 잘 먹고 잘 자면 일주일 만에 나을 거야.”


장난처럼 던진 할머니의 지혜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도 난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감기는 시그널(signal)과 같은 질병이다. 감기는 우리 신체 면역체계가 부실해졌다는 것을 알려주는 순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기 바이러스를 퇴치하는 것이 치료가 아니라, 그 바이러스를 견딜 수 있는 몸 상태를 만드는 것이 치료이다.


내 수련감독이 말한 ‘영혼의 감기’ 혹은 ‘마음의 감기’도 마찬가지 아닐까? 우울감이라는 바이러스를 퇴치하는 것이 우울증의 치료가 아닐 수 있다. 우울증은 우리 마음의 면역체계가 부실해 졌음을 알리는 순기능을 하는 시그널이다. 그저 항우울제를 빨리 처방받는 것이 능사가 아닐 수 있다. 마음의 면역체계가 먼저 강화되어야 한다. 잘 먹고 잘 자는 것이 신체의 면역체계를 돕는 일인 것처럼, 마음의 면역체계가 튼실해지려면 믿을 만한 사람과 숨김 없이 자신 마음과 감정을 나누는 일이 필수적이다.


OECD 통계에 따르면 한국 성인 우울증 유병률은 36.8%다. 이는 성인 10명 중 4명이 우울한 상태라는 의미일 수 있다. 정신의학 전문가들은 이런 한국인들이 항우울제 처방률은 매우 낮다는 점을 문제로 지적한다. 그러니 적절한 치료시기를 놓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 한인들 모두가 자신의 마음이 아픈 것을 남에게 드러내는 문화에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 우울증이 극심한 단계에 이를 때까지 적절한 치료를 거부할 뿐 아니라, 아무와도 자신의 마음을 나누지 않는다. 해외에 거주한다면 고립감은 더욱 배가 간다. 약 처방도 중요하지만, 부실해진 면역체계를 그냥 방치하는 것이 더욱 큰 문제이다.


최근 대한민국 정부는 비(非)의료 사회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정신건강을 돌보는 전문가들을 ‘마음건강’ 전문가라고 분류하기 시작했다. 지난 5월, 윤석열 정부는 국민의 정신건강 정책을 대전환하는 혁신방안을 발표했다. 가장 중요한 핵심은 비의료 마음건강 서비스를 확대하는 것이다. 청년 건강검진을 2년마다 시행하고, 지난 7월부터 심리상담을 총8회 제공하는 ‘전 국민 마음투자 사업’을 시행하면서 임기 내 100만명에게 심리상담을 지원하겠다며 당찬 계획을 시작했다.


지난 8월 초 미국 내 한인들의 자살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1999년부터 2020년까지 21년간 미국 내 18~25세 아시안 4082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보도를 접했다. UCLA 보건정책연구소가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 의하면 캘리포니아주에 거주하는 한인 5명 중 1명은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으며 특히 한인 청소년은 그 비율이 30%에 달할 정도로 높다는 기사였다. 한국에 살던, 미국에 살던 우리 한인들이 이렇게 자살률이 높은 이유는 어쩌면 ‘영혼의 감기’의 대처법을 아직도 잘 모르기 때문일 수 있다. 나는 우리 한인들이 우울감을 느끼자마자 항우울제를 처방받는 일이 문제의 유일한 해법이 아니라고 믿는다. 감기는 죽을병이 아니듯, 우울증 역시 반드시 자살로 이끄는 죽을병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의 면역체계를 보강하는 일, 제일 먼저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아도 부정적인 평가를 받지 않을, 그 한 사람을 찾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없다면 지역에서 마음건강 전문가를 찾아가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감기와 우울증은 결코 죽을병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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