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역사, 날것 그대로의 기억
이우근
변호사· 숙명여대 석좌교수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은 중세 기독교의 금서였던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의 <희극론>에서 비롯된 수도원 살인사건의 수사 추리물이다. 기독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중심 사상이 성서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여겨 학문의 세계에서 추방했다. 거의 천년 동안 잊혔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유럽에서 부활한 것은 뜻밖에도 이슬람 덕분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책들은 십자군전쟁을 거치면서 이슬람 세계에 들어가 아랍어로 번역되었는데, 무슬림 철학자 이븐 루쉬드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대한 저술들을 라틴어로 꼼꼼히 번역했다. 훗날 토머스 아퀴나스는 그 라틴어 번역본을 토대로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콜라철학으로 융합시켰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서양철학의 큰 줄기로 서게 된 것은 ‘이슬람철학의 관점에서 한 글자도 빼거나 더함이 없이 원래의 날것 그대로’ 번역한 이븐 루쉬드의 공이었다. 그는 단테의 <신곡>과 라파엘로의 <아테네학당>에 등장하는 보기 드문 아랍인이다.
베토벤이 ‘개울(Bach)이 아니라 바다(Meer)’라고 칭송한 바흐(J. S. Bach)는 생전에 널리 인정받지 못했다. 그가 ‘음악의 아버지’로 추앙받게 된 것은 거의 100년 뒤 <마태수난곡> 악보를 우연히 발견한 낭만주의 작곡가 멘델스존이 바흐의 악보들을 두루 수집해 ‘자유롭고 서정적인 낭만파의 기법으로 음표 하나도 바꿈이 없이 원본 그대로’ 출판한 다음의 일이다.
기와집 한 채 값이 1,000원이던 일제시절, 기와집 열한 채를 살 수 있는 거금 11,000원으로 <훈민정음 해례본>을 사들인 억만장자 전형필…. 그는 국내의 거간꾼과 일본의 수장가들을 찾아다니며 진귀한 우리 문화재를 구입하느라 그 많은 돈을 아낌없이 썼다. 그의 간송미술관은 국보인 동국정운, 단원의 화첩, 겸재의 진경산수화, 고려청자, 이조백자 등 소중한 문화재들을 ‘선명한 색조로 붓끝 한 점 덧칠함이 없이 본래의 날것 그대로’ 소장하고 있다.
역사는 ‘기억의 대상’이지 ‘기대의 대상’이 아니다. 어떤 기대를 품고 제멋대로 수정한 기억은 올바른 역사가 아니다. 고전적 역사학의 선구자 랑케는 ‘과거에 있었던 사실 그대로를 기술하는 것이 역사’라고 주장했다. 주관적 역사해석을 옹호한 에드워드 카조차도 ‘역사에 추상적 가치기준을 세워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객관적 사실을 주관적 신념으로 각색한 시나리오는 역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시간 이해에 혁명적 전환을 가져온 아우구스티누스는 ‘과거는 기억으로 남은 현재, 미래는 기대로 다가오는 현재’라고 보았다. 따라서 ‘과거는 지나가고 없는 시간, 미래는 기대하나 지금엔 없는 시간, 현재는 끝없이 지나가며 없어지는 시간’이다. 그렇다면 현존하는 시간은 ‘지금의 기억으로 남아있는 과거’뿐이다. 역사의 기억이 소중한 이유다. 덧칠하거나 각색된 기억은 반역사적이다. 날것 그대로의 기억이 진정한 역사다.
1948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 창건일, 그 25일 뒤인 9월 9일은 북한정권 수립일이다. 25일 만에 한 나라의 정부를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북한은 그전에 이미 토지개혁, 화폐발행, 인민군창설, 인민위원회 구성을 일사천리로 끝낸 뒤 헌법을 확정하여 남북분단을 전제로 ‘사실상의 단독정부’(de facto separate government)를 수립하고 행정활동을 개시한 상태였다. 대한민국이 출범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북한정권수립을 대외적으로 선언했을 뿐이다.
실질적으로 북한보다 뒤늦은 대한민국 건국에 분단의 원죄를 덮어씌우는 것은 기억의 날것을 이념으로 덧칠한 역사왜곡일 따름이다. 6․25 남침은 붉은 군대의 동족살육이었다. ‘내전의 연장’이니 ‘통일의 성전(聖戰)’이니 하는 따위의 선전은 이데올로기로 각색한 시나리오에 불과하다. 교과서를 어떻게 바꾸든, 덧칠하고 각색한 기억이 올바른 역사일 수는 없다.
건국의 어버이들께, 그리고 우상의 억압에서 자유를 지켜낸 선인(先人)들께 감사와 존경의 뜻을 아뢴다. 서울 한복판에서 ‘자주평화통일대회’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의미의 8․15 집회가 열리는 현실을 마주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