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중앙아시아에서 만난 8․15"
이우근
변호사/ 숙명여대 석좌교수
러시아 사람 보로딘은 유라시아 대륙 서쪽 끝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머나먼 동쪽 우랄산맥 너머를 가슴에 품고 교향시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를 작곡했다. 한국 사람인 나는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 서울에서 머나먼 서쪽 알타이 산맥을 넘어와 중앙아시아의 초원에 서서 대자연의 신비를 바라보고 있다. 우랄, 알타이, 톈산 등 산맥으로 둘러싸인 카자흐스탄의 차린 계곡에서….
들풀이 듬성듬성한 카자흐스탄의 스텝지역은 수목이 우거지고 시냇물이 흐르는 시푸른 목초지가 아니다. 거칠고 삭막한 황무지에 가깝다. 며칠 전 광복절 무렵에 사단법인 통일문화연구원이 카자흐에서 주관하는 ‘고려인 독립운동가 추모의 벽’ 제막식에 참석했다. 한국-카자흐 우호공원 조성 기념행사, 고려인 한글교육에 힘써온 분에 대한 통일문화대상 시상식도 함께 열렸다.
1930년대 후반, 스탈린은 반대세력을 고문·학살하고 소수민족을 강제로 이주시키는 ‘대숙청’의 만행을 저지른다. 소련 영토 안에서 살고 있던 한인과 폴란드인, 핀란드인 등 수백만 명이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낯선 땅으로 끌려갔다. 그들이 일본의 스파이 노릇을 한다거나 소련의 농업 집단화 정책에 반대한다는 이유에서였다. 특히 연해주에 자치주를 세우려는 한인들의 노력은 스탈린을 적잖이 자극했다.
연해주에서부터 중앙아시아까지 6천여 km를 강제로 끌려온 20여만의 한인들은 숱한 병사자, 아사자의 시신과 함께 카자흐의 우슈토베 역에 내동댕이쳐졌다. 우슈토베의 황야는 강제 이주된 한인들이 맨 처음 정착한 땅이다. 그들은 황무지에 토굴을 파거나 움막을 짓고 들어가 살면서 중앙아시아의 고려인이 되어갔다. 척박한 땅을 어렵사리 개간해 벼농사를 시작한 그들은 소련의 공산독재 아래에서 자유의 숨결을 마음껏 누릴 수 없었다. 8․15 광복과 건국도 그들에게는 남의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바슈토베 언덕의 고려인 묘지는 주변의 광야만큼이나 처연했다.
모질고 각박한 삶의 여건 속에서도 고려인들은 후손에게 한글과 우리말을 가르쳤고, 한글로 고려신문을 발행했으며, 고려극장을 세워 중앙아시아에 우리 민족문화가 뿌리내릴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다. 1930년대에 세워진 고려극장은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오래된 한민족 공연장으로, 1968년 카자흐 국립극장으로 승격되었다. 소련 시대에는 김일성 독재에 반대하는 북한출신 예술인들이 주로 활동하다가, 현재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벗어나 한민족 문화 창달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차린 계곡에서 만난 젊은 카자흐인은 나를 보자마자 대뜸 “코리아에서 왔느냐?”고 물으며 자신을 방탄소년단 팬이라고 소개했다. 알마티 시내의 아르바트 거리에서는 카자흐 청년들이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목청껏 불러대고 있었다. 카자흐에서 고려인들은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다. 그 나라 국회의원이 된 고려인도 있다.
원소기호가 붙은 모든 광물이 묻혀있다는 카자흐는 자원부국이다. 전략자원인 석유 매장량이 세계 12위, 우라늄 매장량이 세계 2위를 차지한다. 그밖에 천연가스·석탄·크롬 등 각종 광물자원도 넘쳐난다. 카자흐의 종주국을 자처하는 러시아, 신장위구르에서 카자흐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은 물론 카자흐 국영가스기업과 합작회사를 설립·운영 중인 미국도 카자흐의 풍부한 광물자원에 군침을 흘리고 있다. 중앙아시아는 바야흐로 러시아·중국 세력과 미국·유럽 세력의 각축장이 되어가고 있다.
지난날 대한민국은 간고한 삶을 살아낸 고려인 사회에 너무 무심했다. 그들에게 문화적, 경제적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통일은 한반도 남북의 문제만이 아니다. 한반도를 넘어 전 세계에 흩어져있는 한민족 모두의 문제라는 것이 통일문화연구원의 인식이다.
토굴과 움막 속에서, 공산독재의 억압 속에서 8․15 광복의 감격도, 대한민국 건국의 기쁨도 함께 하지 못했던 카자흐스탄의 고려인들은 광복과 건국을 바탕으로 오늘의 번영을 이룬 조상의 나라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한민족의 긍지를 한껏 품어 안고 있다. 중앙아시아의 초원은 우리에게서 멀어져가는 8․15의 의미를 새롭게 가르쳐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