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신호등] 조선을 조선인보다 더 사랑한 ‘닥터 셔우드 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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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신호등] 조선을 조선인보다 더 사랑한 ‘닥터 셔우드 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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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영

미주조선일보 독자부 위원


역사란 인류가 걸어온 길을 기록한 동시에, 과거의 상황을 오늘의 현실에 비추어 보는 커다란 거울이다. 태어나기 훨씬 이전의 시대라도, 우리는 기록과 증언을 통해 그 시간을 만나고 그 때의 상황을 알게 된다. 조선후기 고종의 재임시기는 제국열강들이 야욕과 침탈로 한반도를 뒤흔들던 격동기였다. 


조선의 정치는 당파싸움의 여파로 혼란스러웠고, 서양문물은 봇물처럼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때 토마스, 아펜젤러 부부, 언더우드, 스크랜튼, 그리고 로제타 셔우드 홀과 윌리엄 제임스 홀 부부 등 미국 선교사들이 조선 땅에 발을 디뎠다. 이들은 조선인들에게 기독교 전파뿐만 아니라, 교육, 의료, 서양문화를 전하며, 조선의 개화에 불을 붙였고, 근대화를 이끌었다. 


그 중심에 조선에서 출생한 ‘셔우드 홀(Sherwood Hall)’ 이라는 백인 소년이 있었다. 그는 1893년 11월 10일, 의료선교사인 부친 ‘윌리암 제임스 홀(Dr. William James Hall)’과 모친 ‘로제타 셔우드 홀(Dr. Rosetta Sherwood Hall)’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선의 첫 백인 아이였다. 그가 자라면서 보고, 경험한 조선의 풍경과 조선인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기록한 책이 '조선회상' 이다.


17세까지 한양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그는 미국으로 건너 가 학업을 이어갔다. 매사추세츠의 마운트허먼(Mount Hermon) 고교, 오하이오주의 마운트유니언대학을 거쳐 의학도의 길을 택했고, 대학에서 만난 의학도 매리언(Marion)과 결혼했다. 이후 토론토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뉴욕 롱아이랜드의 홀츠빌 결핵요양소에서 인턴과정을 마치고 결핵 전공의가 되었다.


1926년 홀은 33세에 의료 선교사가 되어, 조선을 떠난지 15년만에 부인과 함께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는 주로 한양과 평양에서 결핵환자를 돌보았다. 당시 전국적으로 결핵환자는 상상 이상으로 전염되었고, “결핵은 곧 죽음” 이라는 조선인들의 사고방식에 충격을 받았다. 조선인들은 결핵을 ‘귀신이 내린 병’으로, 운명적으로 피할 수 없는 불치의 '부끄러운 병' 으로 간주했다.


닥터 홀은 치료보다 계몽이 더 시급함을 판단하고, 1928년 해주시 해변가에 ‘해주구세요양원’을 세웠다. 이곳이 한국 최초의 결핵치료병원이다. 당시 다른 나라들은 결핵환자 20명 중 1명이 목숨을 잃는 정도였지만, 조선은 환자 5명 중 1명이 숨졌다. 전국에서 해주로 모여드는 엄청난 환자들, 그들의 치료비와 급식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때 닥터 홀은 미국에서 경험한 ‘크리스마스 씰(Seal)’ “을 떠올렸다. “결핵 퇴치기금을 모으기 위해 연말마다 우편물에 붙이는 작은 씰, , 이것을 조선에서도 써 보면 어떨까.” 


조선뿐 아니라 동양에서도 ‘전례가 없었던 것’ 을 처음 시작하는 일이라, 허가 신청, 설득부터 난관이었지만, 허가받은 후, 판매도 불확실했다. 홀은 ‘씰’에 조선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상징을 도안에 넣기로 생각했다. 조선인들은 언제든 몇 번이나 들어도 좋아하는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 이야기에서 힌트를 얻어 ‘거북선’을 씰의 도안으로 결정하고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일본 총독부가 즉각 막아섰다. 거북선에 대한 증오심과 자격지심이 그토록 깊은 줄을 몰랐다. 결국 첫 크리스마스 씰의 도안은 ‘거북선’ 대신 ‘남대문’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럼에도 크리스마스 씰은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흥미롭게도 조선인들은 크리스마스 때보다, 설 명절에 씰을 더 많이 구입했다. 이 씰 한장이 결핵 퇴치의 불씨가 되었고, 대한결핵협회의 ‘크리스마스 씰 운동’으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실 크리스마스 씰의 역사는 1904년 덴마크의 한 우제국 직원의 작은 생각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유럽에는 결핵이 만연했고, 많은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연말마다 산더미처럼 쌓이는 우편물에 동전 한 닙짜리 ‘씰’을 붙인다면, 그 돈으로 아이들을 살릴수 있지 않을까.” 그의 제안은 덴마크 국왕의 지지을 얻었고, 세계 최초의 크리스마스 씰이 탄생되었다.


닥터 홀은 거의 15년간 결핵 치료와 병원 운영하는일을 병행했다. 닥터 홀의 결핵퇴치 운동이 활발해 질수록 일본 총독부는 그를 밉게 보고 있었다. 결국 ‘스파이’ 라는 황당한 혐의로 그를 체포하고 벌금 5000엔과 함께 국외로 추방하고 말았다.


1941년 조선을 떠난 닥터 홀은 인도로 건너가 1963년 은퇴할 때까지 결핵퇴치와 의료선교에 헌신했다. 은퇴 후 캐나다 벤쿠버에서 노년을 보내던 1984년, 그의 부친이 설립한 ‘광성고등학교’로부터 개교 90주년 기념으로 한국 초청을 받았다. 꿈에도 그리던 한국에 도착하자 곧바로 양화진에 잠든 부모와 여동생을 참배하고, 대한결핵협회와 광성고등학교를 찾았다. 한국 정부는 그의 공로를 인정해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다.


1991년, 98세의 나이로 캐나다에서 별세한 그는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나는 여전히 한국을 사랑합니다. 부디 저를 제가 태어나서 자란 한국 땅에 묻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는 홀의 부모, 동생, 아들, 그리고 셔우드 홀 부부까지 홀家의 6분이 잠들어 있다. 조선에서 태어나 조선을 사랑하며, 조선의 병든 환자들을 위해 평생을 바친 한 의료선교사. 그가 심은 사랑과 봉사의 씨앗은 지금도 매년 발행되는 ‘크리스마스 씰’ 속에서 조용히 싹트고 있다. 2025년의 크리스마스 씰에는 또 어떤 사연의 도안이 나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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