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시니어] “조국 근대화 위해 일하고 또 일했던 박정희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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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 시니어] “조국 근대화 위해 일하고 또 일했던 박정희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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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박정희기념사업회 이재권회장

 

민족중흥과 번영의 터전을 마련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국 산업화의 기틀을 마련한 박정희 대통령은 조국근대화를 신앙으로 알고 일하고 또 일했던 대통령이셨을 뿐만 아니라 경제 민족주의라는 혜안(慧眼)을 가지셨던 분입니다”. 미주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의 이재권 회장(90·사진)은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 밤을 새워 서라도 이야기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이다.

 

#. 경제 민족주의

그가 조국근대화와 경제 개발 외에도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으로 특별히 꼽은 것은 바로 중국 경제를 봉쇄하여 국가의 경제적 독립을 확보한 일이다. 세계 어디를 가든 차이나타운은 있고 중국인들이 사용하는 '죽망(竹網)'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대나무가 땅 밑으로 뿌리를 뻗듯, 화교들이 거주국 곳곳에 경제적 네트워크를 구축하며 영향력을 확대해 왔다는 뜻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계획 속에는 분명 경제 민족주의가 있었기에 화교들의 경제활동을 제한했다는 것이다. 당시 화교들이 부동산 소유권과 경제 활동의 자유를 부여 받았다면, 여타 동남아시아 국가들처럼 현재 한국의 대기업 중 상당 부분이 중국계일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 ‘중국인들이 무비자 입국을 하고 자신들의 군복을 입고 한강에서 행진까지 하며 투표도 할 수 있는지금의 대한민국을 보면 박정희 대통령이 옳았다는 것이다.

 

#. 올 곧은 공무원 생활

대구 출신인 이회장은 지난 1961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1964년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수료한 후 1961년부터 1973년까지 상공부 근무(과장), 1971-73 KOTRA 수출학교 및 성균관대학 무역대학원 강사를 역임했다. 상공부 과장 시절 올 곧은 공무원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당시만 해도 5.16 이후라 모든 질서를 새롭게 하던 시절이니 어떤 청탁이나 무리한 요구가 정치권에서 있었다고 해도 단호히 거절할 명분이 충분했다. 국가재건최고위원회의 혁명 공약 3호가 바로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다시 바로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한다였기 때문. 때로는 이 올 곧음이 출세에 지장이 있을 거라고 했지만 그는 소신 것 일하는 공무원이었다고 자부한다.

 

#. 차세대에 역사를 심다

도미 후 Pyramid Lake R.V. Resort 대표와 Dial 부동산 투자회사 대표 등 사업으로도 성공한 이회장이었지만 오랜 시간 한인 커뮤니티를 지켜보면서 뭔가 차세대들을 위해 뜻깊은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여 시작한 것이 조국근대화의 기수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의 일이었다. 1984,85,97년 남가주 기독실업인회 회장(3), 1991-92년 남가주기독교장로협의회 회장(2), 1995-99년 민주평통 종교분과위원장(2), 2002-03년 남가주 한인이민 100주년 기념사업회 부회장, 2001-2005 한인동포장학재단 총무이사, 2003년 북한인권한인협의회 회장, 2008년 대한민국 LA 총영사 자문위원 등 굵직굵직한 한인 사회의 리더 역할을 해 온 그였다.

그러나 가장 중점을 갖고 모든 정열을 다 바친 것이 바로 미주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였다. 기존 기념사업회가 박정희 대통령의 족적과 일화를 발굴해내고 기념관 건립이나 동상을 세우는 일을 추진해 왔다면 이회장은 여기에 덧붙여 차세대에게 역사를 심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차세대를 위해 장학금을 지급하거나 탄신일 행사 때 수기를 중‧고등학생들이 낭송하는 일 등은 모두가 이민 2, 3세들에게 대한민국의 경제 번영을 이끌어 온 박정희 대통령을 올바로 알고 공과 과에 대해서 제대로 알리기 위함이다. 때문에 지금도 아무리 먼 거리라도 자신을 필요로 하는 모든 곳을 방문하고 있다. 과연 그의 강철체력이 궁금했는데 단언코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이재권 회장. 은퇴를 모르는 그의 열정은 지금도 한인타운의 귀감이 되고 있다.

이훈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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