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눈먼 민중, 매혹의 노랫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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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근 칼럼] 눈먼 민중, 매혹의 노랫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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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근 

변호사 / 숙명여대 석좌교수

PEN.KOREA 인권위원장


독재자는 공포와 환상의 두 날개로 권력의 세계를 펄펄 날아다닌다. 독재정권이 경찰·사법·군대를 기어이 움켜쥐려고 노심초사하는 이유는 공포심으로 국민의 저항의식을 짓누르기 위해서다. 또 하나의 날개인 환상은 권력에 카리스마적 정당성을 덧씌우는 선전·선동이다.

 

나치여성동맹 등 여성단체나 히틀러청소년단만이 나치 추종세력이 아니었다. <존재와 시간>을 쓴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 결단주의 법이론을 제시한 법학자 카를 슈미트 등 지성인들이 나치에 협력했다.


히틀러를 비판한 카를 야스퍼스, 테오도르 아도르노, 한나 아렌트, 발터 벤야민 등은 일자리를 잃거나 망명길에 나서야 했다. 히틀러를 암살하려는 발키리 모의에 참여한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 ‘백장미 운동’으로 나치에 저항한 한스·소피 숄 남매는 끝내 처형당했다.


독일민족의 아리안 우월 신화로 홀로코스트의 정당성을 꾸며낸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게르만족은 순수한 아리안의 후손, 유대인은 열등한 인종’이라고 주장했다.

 

독일민중은 히틀러가 외치는 아리안 우월신화의 광채에 눈이 멀었다. "그 시절, 우리는 눈이 멀었었다.” 합리적이라는 독일인들의 회상이다. 그들은 ‘눈먼 민중’이었다. 

 

스탈린은 민중을 혁명의 주체가 아닌 혁명의 도구로 전락시켰다. 민중이 두려워한 것은 비밀경찰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서로를 감시하는 어둠의 세상에서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스탈린에 대한 공포와 숭배가 내면화된 민중은 정치종교의 눈먼 신도들이 되었다. 


모택동은 마르크시즘과 중화주의를 제멋대로 결합해 권력의 토대로 삼았다. 그는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외쳤고, 홍위병들은 ‘천하를 붉게 물들이자’는 구호로 민중의 공산주의 혁명을 부르짖었다.

 

모택동은 중국의 전통적 가치인 유교를 봉건 잔재라고 비난했지만, 중국 민중은 그를 민족의 화신으로 추앙했다. 모택동은 지금도 북경 천안문의 대형 초상화 속에서 눈먼 민중을 굽어보고 있다. 


그렇지만 민중이나 군중이 곧 국민은 아니다. 민중은 사회적 지위가 낮은 일반 대중 또는 서민층을 나타내는 느낌이 크지만, 국민은 법률로 국적을 부여받아 정치적ㆍ법적 권리와 의무를 지니는 나라의 주권자다. 


국민의 의사는 보통 여론조사나 유권자의 투표결과로 나타나지만, 여론조사나 투표결과가 언제나 주권자의 의사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히틀러도 스탈린도 모택동도 모두 민중의 지지를 국민의 지지라고 강변했는데, 역사의 평가와 진실은 그와 정반대다. 수백만, 수천만 명이 저들 독재자의 손에 희생당했다.


독재체제에서 민중은 억압받는 수동적 객체가 아니라 권력과 결합한 능동적 주체로 등장하기도 한다. 힘없는 민중은 힘 있는 독재권력에게 자신을 투사하는 심리적 도취상태에서 스스로 권력에 참여한다는 환상에 빠진다. 삶의 현실이 불안정할수록 그 환상은 더욱 커진다. 자유를 포기하고 권력 앞에 납작 엎드린 민중은 독재자와의 일체감을 종교적ㆍ주술적 확신으로까지 받아들인다.


공포와 열광이 뒤섞이며 비판능력을 잃어버린 눈먼 민중의 도착심리에서 전체주의 독재가 싹튼다. 개인이 군중 속에 파묻히고 민중이 국민의 자리를 차지하면, 개인의 주체적 사고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눈먼 군중은 익명성에 파묻혀 권력자의 선동에서 구원의 약속을 읽으며 환호한다.


 민중은 왜 독재자에게 열광하고 복종하는가. 권력의 폭력과 통제, 그 공포 때문만이 아니다. 파괴본능인 타나토스와 생존본능인 에로스를 혼동한 나머지, 억압과 복종을 쾌락으로 받아들이는 일그러진 환상 때문이다.


불행과 고통 속에서 자신감을 회복시켜줄 지도자, 그 거짓 메시아를 기다리는 눈먼 군중의 환상이 독재를 부르는 비극의 노랫소리로 울려 퍼진다. 오디세우스 일행을 죽음으로 이끄는 세이렌의 황홀한 노래처럼…


눈먼 민중을 유혹하는 그 노래는 주권자인 국민이 합리적 비판의 눈을 부릅뜰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 현대사에서도 그 노랫소리가 간간이 울려왔고 또 울려올 수 있다. 다시는 듣고 싶지 않은, 음울하지만 매혹적인 세이렌의 노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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