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취자 여러분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모두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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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취자 여러분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모두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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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코리아 최영호 방송위원이 오는 31일 고별방송을 한다. 은퇴를 앞두고 지난 28일 본지와 라디오코리아에서 인터뷰를 한 최 위원이 사무실과 스튜디오에서 포즈를 취했다. 1992년 4.29 폭동 때 재난안전방송을 성공적으로 한 소식이 알려지자 당시 부시 대통령이 라디오코리아를 방문했다. 뒷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최 위원, 부시 대통령 왼쪽은 당시 통역을 진행한 라디오코리아 류근회 기자. 1990년 9월 LA다저스 첫 한국어 중계방송을 하던 모습으로 맨 왼쪽이 최 위원이다. (위에서부터) /김문호 기자, 최영호 위원 제공 


'영원한 방송인' 최영호 위원 오늘 은퇴

라디오코리아 창립멤버로 36년 '영광' 

"한인사회에 본격 '라디오 시대' 열고

4.29 때 안전재난방송 커뮤니티 단합

다저스 한국어 중계는 잊지못할 성취"  

후배들이 방송의 명성 잘 이어줬으면


“청취자 여러분이 있었기에 방송인 최영호도 있었습니다. 그동안 보내주신 과분한 사랑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모두들 건강하십시오.”  


라디오코리아 최영호 방송위원이 오늘(10월 31일) 방송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한다. 최 위원은 이날 모닝뉴스(오전 7시~10시)를 끝으로 36년 방송인생을 내려 놓는다. 


1989년 2월 1일 당시 가수 이장희, 동아방송 출신 김병우 PD와 의기투합해 미주 한인사회에 라디오 시대의 개막을 알린 주인공. 회사 살림을 책임지는 총무를 시작으로 음악방송 DJ, 메인 뉴스 앵커, 사장, 부회장까지 두루 거치며 4.29 때의 맹활약으로 H.W.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American Story Award’를 수상하고, LA다저스 경기 한국어 중계로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목소리를 남긴, 그야말로 라디오코리아 역사의 산증인이 아니던가.


그러는 사이 세월이 흘러  ‘3총사’ 도 진작 흩어진 마당에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켜왔으니 지금의 은퇴가 왜 남다르지 않을까! 


은퇴 소식을 접하고 인터뷰를 위해 방송국을 찾은 지난 28일. 반갑게 기자를 맞은 최 위원은 불쑥, 전날(27일) 밤 LA다저스가 월드시리즈 3차전서 연장 18회 끝에 토론토에 한 점차(6-5) 승리를 거둔 이야기부터 꺼냈다.

 

“연장 18회 프레디의 끝내기 홈런이 터지는 순간, 정말 짜릿했어요. 아, 이 경기가 바로 나를 이야기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만큼 극적이면서도 영광스러운 일은 혼자서 이룰 수는 없지요. 다저스 승리처럼, 라디오코리아에서의 나의 영광도 직원들 모두와 함께 열심히 노력해 만들어 낸 것이었요. 다시 한 번 청취자와 커뮤니티에도 감사하지요. 이제, 저야 그 자리에서 물러나지만 후배들이 그 명성을 잘 이어 나가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 한인사회에 본격 ‘라디오 시대’를 열다 

“우연이죠. 아니 필연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내 삶이 ‘방송인’으로 이렇게 정의 될 지는 몰랐어요.” 

최 위원이 말한 우연과 필연은 LA에서 ‘동아방송 3총사’의 극적 조우와 라디오 방송의 시작이다. 


“세상에 그런 인연이 다 있을까요. 아 글쎄, 대학졸업을 앞두고 동아방송에서 3개월 가량 방송 일을 도운 적이 있어요. 당시 친구 이장희가 음악방송을 진행했고 PD가 김병우씨였어요. 저는 장희 만난다는 핑계로 가서 앨범 찾아주고, 간단한 스크립도 써 주고 뭐 그렇게 지냈는데, 그때 인연이 LA로 이어진 거요.”

그렇게 해서 다시 만난 3총사는 방송 일에 해박한 김병우 PD 제안으로 라디오 방송사를 하기로 했다. 


방송을 하게 된 또 다른 필연도 있다. 이건 잘 안 알려진 이야기다. 최 위원이 타고난 ‘끼’를 갖고 있었다는 것. 재치있고 입심 좋은 '방송 끼', '목소리 좋고 노래도 잘 하는 '연예인 끼'. 


“만약 제가 미국에 오지 않았다면, 아마도 ‘세시봉’이 됐을 지도 모르죠. 세시봉의 윤형주와는 초등학교 동창으로 잘 알고 지냈고, 장희와는 중학교 때부터 대학 때까지 어울리며 함께 돌아다녔어요. 그들이 세시봉에서 노래할 때, 나도 작은 싸롱에서 노래를 불렀으니까요. 형주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노래는 영호가 제일 잘한다’고요.” 


그렇게 ‘끼’ 있는 사람들이 뭉쳐서 탄생한 라디오 방송이었다. 

물론 당시에도 한인 라디오 방송이 없던 것은 아니다. 최 위원에 따르면 일주일에 한 시간 정도 하는 방송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짧고 잘 알려지지도 않아 모두가 새로운 미디어 탄생을 갈망하던 때였다. 


“AM 주파수 1300으로 첫 방송이 나가던 날, 그 감격은 정말 대단했어요. 한인사회와 고국 소식, 음악 방송이 전파를 타기 시작했으니, 이민생활 자체가 달라지기 시작한 거죠. 차를 운전하면서 또 일터에서도 라디오는 인기 최고, 삶의 활력소 그 자체였지요.”


#. 내 운명과 한인사회 위상을 바꾼 ‘4.29’

“LA에서 방송인으로 살면서, 꼽아 온 3가지 이슈가 있어요. 라디오코리아 개국, 4.29폭동 그리고 LA다저스와 LA레이커스 한국어 중계입니다. 사실상 제대로 된 첫 라디오 개국이 한인 이민사의 역사를 새로 쓴 일이었다면, 4.29 방송은 한인사회가 아픔을 딛고 하나가 돼 주류사회에 편입하는 계기가 됐어요.”


라디오 개국 때만 해도 최 위원은 주로 총무 일을 했다. 물론, 70~80년대 음악을 트는 1시간짜리 음악방송을 하기는 했지만 비중이 크지 않았다.  개국 초기부터 회사가 번창하면서 총무 업무는 계속해서 늘어만 갔다. 방송일은 한국에서 온 연예인들이 대부분 맡을 때였다.


그러던 차에 3년 리스해서 사용하던 AM 1300의 스테이션 주인이 바뀌면서 주파수 가격이 껑충 뛰었다. 고심하던 당시 이장희 사장이 결단을 내렸다. AM 1300은 12시간 방송이었고, 청취거리도 넓지 않았기에 24시간 방송이 가능하고 청취반경도 큰 1580으로 갈아탄 것이다. 그게 1992년 2월이었다.


그렇게 2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4.29 폭동이 발생했다. “폭동이 터지면서 방송국으로 계속해서 제보 전화가 걸려 오는데, 한국에서 온 연예인들이 LA 지리를 잘 모르니 도무지 감을 잡지 못했지요. 당연했고요. 그때 이장희 사장이 ‘안 되겠다. 영호야 니가 마이크 잡아’.”


방송인 최영호의 탄생을 알리는 시작이었다. “저야 LA에 살고 있었으니, 청취자가 제보하는 것들을 잘 이해해 전달할 수 있었지요. 운전자들에게는 소요가 있는 지역을 우회하도록 했고, 리테일 업주에게는 폭도들의 진행 방향을 수시로 알려 인명은 물론 가게 피해도 줄일 수 있도록 도왔지요. 그렇게 2주를 정말 정신 없이 방송했어요. 잠도 못자고 하루 20시간 쯤은 한 것 같아요. 그렇게 하고 나니까 나중에는 정말 눈이 다 안 보이더라고요. 그때부터 안경을 쓰기 시작했어요.”


폭동 때만 해도 한인 커뮤니티엔 새로운 라디오 방송이 진출해 경쟁을 하던 때였다. 하지만, 최  위원 말을 빌리면 “쨉도 안됐다.”


“우리는 주파수를 바꿔 24시간 재난안전 방송을 알기 쉽게 했다면, 상대는 우리가 사용했던 12시간짜리 주파수로 지리도 잘 모르는 방송을 했으니, 경쟁이 될 수가 없었지요. 청취자들이 모두 라디오코리아로 넘어오는 계기가 됐을 겁니다.”


4.29는 전국적인 이슈였다. “라디오코리아를 통해 한인사회가 하나로 뭉쳐 슬기롭게 대처하자, 백악관에서도 연락이 왔고,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방송국을 방문하는 초유의 일이 현실로 벌어졌다. "부시 대통령은 3시간 가량 머물면서 재난방송 노고를 치하하고 피해를 최대한 보상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뜻을 커뮤니티에 전했어요. 한인사회가 진정 하나가 되고 위상도 높아지는 순간이었죠.”


최 위원은 4.29의 아픔은 컸지만 그 일을 계기로 한인사회가 주류사회와도 교류하며 진정한 이민 커뮤니티로 커가게 됐다고 말한다. “사실, 4.29 전까지만 해도 한인 이민자들은 이방인 그 자체였어요. 주류사회와는 거의 담을 쌓고 살았거든요.”


4.29 폭동 방송을 계기로 최 위원은 아침 뉴스 앵커를 맡으며, 그 영향력을 더욱 확대할 수 있게 됐다. “폭동 후  원래 모닝뉴스를 하던 앵커가 이직을 했어요. 대타가 필요했는데, 4.29 방송의 영향으로 졸지에 메인 뉴스 앵커로 발탁됐던 것이지요.” 


#. 이민사회 활력소가 된 LA다저스 한국어 중계 

아무도 찬성하지 않았다. 이장희 사장조차 시쿤둥했지만 최 위원은 과감히 밀어부쳤다. “미국와 살면서 미국을 알아야 할 거 아닙니까. 그러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이 스포츠, 특히, 야구, 농구, 풋볼 등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해서 경영진을 설득하고 당시 다저스 구단주인 피터 오말리를 만난 최 위원은 다저스 경기 한국어 중계권 계약을 따냈다. 


“1990년 9월 9일 일요일이었어요. 신티내티 레즈와의 경기였는데 6-4로 이겼어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해요. 영어, 스패니시, 불어 다음으로  다저스의 4번째 언어 방송으로 기록됐지요. 그때 녹음 테이프는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남아 있어요.”


최 위원이 다저스 경기 중계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한인들에게 단순히 우리말로 미국 스포츠를 소개했다는 것만이 아니다. 야구와 레이커스 농구 중계를 통해 취미생활도 하고, 한인들이 미국사회의 일원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기회를 제공하게 됐다는 것 때문이다. 


“야구명문, 서울고 출신이라 야구를 원래 잘 알았냐고요?” 사실 최 위원이 야구를 잘 알게 된 것은 이민 후 영어공부를 하면서부터라고 했다. “미국에서 살려니 영어를 배워야 하잖아요. 그래서 듣기는 다저스 야구중계로 하기 시작했어요. 당시 다저스 중계를 한 빈 스컬리의 발음이 매우 정확했거든요. 읽기(독해)는 LA타임스 말고 LA이그재미너라는 신문이 있었는데, 딱딱하지 않고 재미있게 글을 쓰는 편이었어요. 그렇게 시작한 게 다저스 야구와의 시작이었죠.”


최 위원은 이민초기 JB머컨타일이라는 무역회사에 다녔는데, 이 때 다저스와 레이커스는 물론 프로스포츠에 대해 알아 둔 많은 지식들이 업무에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미국에서는 4대 프로스포츠만 알면 어디를 가도 말문을 틀 수가 있더라고요. 당시 회사는 전국에서 고철을 사서 트레이딩을 했는데, 중부와 동부로 출장이 잦았고, 그때마다 프로스포츠를 매개로 좋은 딜을 많이 할 수 있었어요.”


최 위원은 다저스 경기 한국어 중계를 하면서 오말리 구단주를 설득한 것이 결국 박찬호 선수를 영입하는 데 원동력이 됐다며 자랑스러워 했다. 박찬호 영입 후에는 전국을 돌며 한국의 KBS 방송과 협업해 생중계를 했던 일도 힘은 들었지만 소중한 추억이 됐다고. 


#. 3남3녀의 막내, 바로 위 형이 소설가 최인호

“3살 터울이예요. 학교는 내가 1년 빨리 들어가서 2년 선후배로 서울고, 연세대 동문이기도 했느니 정말 가까웠죠. 형이 조금 까칠해서 어렸을 때는 다투기도 많이 했지만 그래도 영원한 우상이었죠.”


이름난 들어도 유명한 소설 ‘별들의 고향’ ‘고래사냥’ ‘겨울나그네’ ‘깊고 푸른밤’ ‘상도’ 등등이 최 위원의 작은 형 고 최인호 작가의 작품들이다. “형제들 기질이 조금씩 달랐어요. 셋째이자 큰 형은 서울고와 서울 상대를 나와 대우에서 사장까지 지냈어요. 공부 잘하는 모범생 스타일이었죠. 작은 형은 어려서부터 소설을 쓰며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냈죠. 그리고 저는…, 앞서 이야기한 대로 ‘딴따라’ 기질이 있어 가수를 꿈꿨지요. 그런데, 어디 인생이 원하는 대로 가던가요. 그래도 뭐, 방송인으로 36년을 이렇게 잘 흘러 왔으면 이제 좀 쉬어도 되지 않을까요.”


최 위원은 고별방송을 끝내는 대로 여행을 떠날 것이라고 했다. “우선, 일본, 한국으로 가서 가족과 한 달 정도 푹 쉴려고 합니다. 그러면 12월이고 곧 2026년 1월이겠죠. 다음 일은 일단 모두 뒤로 미룰렵니다.”


‘그래도 은퇴를 하시는데, 방송에서 하려고 준비한 마지막 멘트를 소개해 주신다면요?’ 

“특별한 게 어디 있나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모두들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김문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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