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신호등] 제물포(인천)에서 한양(서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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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신호등] 제물포(인천)에서 한양(서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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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영 

미주조선일보 독자부 위원


인천공항에 내리면 서울 중심부까지는 1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다. 500년 전만 해도 제물포에서 한양까지의 여정은 몇일이나 걸렸으며, 험난한 길이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전국의 백성들로부터 거둔 조세(Tax)는 주로 곡물(穀物)이었다. 각 지방에는 조세로 곡물을 수납하고 보관하는 조창(漕倉)이 설치되었고, 그 곡식을 바다와 강을 따라 중앙 수도의 경창(京倉)으로 운반하는 일을 조운(漕運)이라 불렀다. 고려시대에는 전국 지방에 13개의 조창이 설치되었고, 조선은 9개의 조창으로 축소하여 운영했다. 조운으로 운반되는 곡물은 중앙 국가재정의 근간이 되었고, 운송 중에 분실과 훼손이 발생하자 이를 최소화 하는 조운 운송법이 제정되기도 했다.


조선후기부터 조세의 형태가 곡물에서 면포나 동전으로 바뀌면서 조운제도는 시들해져 갔다. 조창(지방 곡물창고)은 주로 곡창지대였던 전라남북도와 경기도 서해안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다. 서해안을 따라 조운선이 제물포까지 곡물을 운송하면, 제물포에서 한양까지는 한강을 떠 다니던 선박으로 경창(중앙 곡물창고)까지 운송되었다. 당시 한강에는 쌀의 선적량에 따라 100섬, 200섬을 실을 수 있는 크기의 다양한 조운선(맹선)들이 운항했고, 황포돛배와 나룻배가 오갔다. 황포돛배는 돛을 달아 바람의 힘으로 운항했고, 나룻배는 노를 젖는 배였다.


이들 배가 오가던 한강 하구는 한강, 예성강, 임진강의 3대 강물이 합쳐 져 마치 바다처럼 넓고 유속이 완만해 서해와 수도를 잇는 물류의 대동맥이 되었다. 고려는 이 물길을 따라 송나라와의 무역이 활발했다. 서해와 한강, 예성강을 통해 송나라의 비단과 도자기, 서적들이 개성으로 들어왔고, 고려는 인삼과 화문석 돗자리, 나전칠기를 수출했다. 한강의 물길은 고려의 혈관이자 개화되는 통로였다.


그러나 무역의 풍요와 비단옷은 고려의 왕족과 귀족들의 사치를 부추겼고, 이는 백성들의 원성을 불러 와 고려멸망의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고려가 망하고 건국된 조선은 도읍을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했다. 그 이유는 한강의 수운 조건과 풍수지리, 정치적 이유 이외에도, 세곡을 한양의 경창으로 운송하기에 최적의 물길과 지형이었기 때문이다.

서해로부터 한강 물길을 따라 한양으로 들어오며 거치는 김포(金浦), 영등포(永登浦), 마포(麻浦) 등은 모두 포구였슴을 보여 주듯 지명에 ‘물가 포(浦)’ 자가 붙어 있다.


김포는 넓은 경기평야에서 생산되는 양질의 쌀을 출하하던 항구였다. 영등포는 한강 남쪽 지역에서 올라 오는 곡식들이 집결하던 포구였다. 마포는 남한강과 북한강을 따라 상류에서 운반된 세곡선의 종착지, 조선의 무역 물류 중심지였다. 오늘의 제물포와 김포, 영등포, 마포는 이미 산업과 교통의 형태가 완전히 달라졌지만, 그 지명 속에는 여전히 옛 조운의 항구 흔적이 남아 있다. 제물포에서 한양까지, 곡식을 운반하던 그 물길은 단순한 운송로가 아니라, 나라의 혈맥이자 백성의 삶을 이어주던 조선의 생명선이었다.


‘밝고 조용한 아침의 땅(Land of the Morning Brightness)’ 미국 의료선교사 ‘닥터 로제타 홀(Rosetta Hall)’ 이 처음 본 조선을 묘사했던 표현이다. 그녀는 1890년 9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증기선을 타고 한국으로 출발했다. 18일 11시간만에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했고, 고베를 거쳐, 다시 SS 오와리호에 승선해 나가사키를 거친 뒤 마침내 제물포에 닿았다. 조선 땅에 첫발을 디딘 날은 1890년 10월 13일 밝아오는 아침이었다.


훗날 그녀는 ‘닥터 셔우드 홀의 어머니’로 조선의 근대 의료선교의 선구자로 기록된다. 당시 그녀가 제물포에서 한양으로 들어가는 육로는 지금처럼 자동차 도로가 아니라 흙길이었다. 그녀가 이용한 운송수단은 ‘가마(轝)’였다. (경인간 최초의 택시로 생각됨) 가마 하나에 8명의 가마꾼이 따랐다. 그 중 4명이 한 팀이 되어 교대로 달렸다. 가마꾼들의 평균 시간당 속도는 6Km, 교대 시에는 바깥쪽에서 함께 뛰던 팀이 가마의 손잡이를 잡고 멜빵을 한쪽 어깨에 걸치는 순간, 안쪽에서 뛰던 가마꾼은 순식간에 물러나며 자리를 바꾸었다. 그 교대는 마치 군무(群舞)처럼 정확하고 민첩해 가마의 속도는 한번도 느려지지 않았다. 저녁 7시면 한양의 성문이 닫히기에, 그들은 반드시 그 시간 전에 도착해야만 했다. 한강변에 이르러 나룻배로 강을 건너고, 다시 가마를 타고 서대문을 향해 달려서 성문이 닫히기 직전에 드디어 성 안에 들어섰다. 그것이 1890년 당시의 ‘제물포 – 한양’ 구간의 여정이었다.


그 때로부터 80년이 지난 1968년 12월, 한국 최초의 고속도로, ‘경인(서울-인천)고속도로’ 가 개통되었다. ‘고속도로’ 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등장했다. 고속도로의 개통과 함께 최초의 고속버스는 ‘한진고속’이었다. 서울–인천 간을 시속 80Km로 40분만에 주파했고, 안내양이 동승해 커피와 사탕, 물수건을 서비스했다. 그 시절 고속버스는 승객들에게는 마치 하늘을 나는듯한 속도감을 느끼게 했다.


한 세기 안에 13배가 빨라진 육로의 이동속도, 단순한 기술발전이 아니라, 근대 문명의 물결이 조선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닥터 로제타 홀’의 가마가 흙길을 달려 한양으로 향하던 그 길 위에, 이제는 수 많은 자동차가, 그리고 사람들의 꿈이 달리고 있다. ‘밝고 조용한 아침의 땅’은 그렇게 달려 와 오늘의 대한민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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