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실의 세상 읽기] 허무를 품은 술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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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실의 세상 읽기] 허무를 품은 술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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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정 실 (문학평론가)

 

한밤중 늦은 시각, 술집 한구석에 홀로 앉아 있는 한 노인이 있다. 귀는 들리지 않고, 가족도 없으며 삶의 의미조차 잃어버린 듯한 얼굴. 1933년 발표된 헤밍웨이(Ernest M. Hemingway)의 단편소설 깨끗하고 밝은 곳의 한 장면이다.

소설에는 단 세 사람만 등장한다. 이름조차 없는노인’, ‘젊은 바텐더’, ‘늙은 바텐더’. 이들은 특정한 인물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임을 암시한다. 노인에게 이 술집은 단순한 음주의 공간이 아니다. 세상의 어둠을 피하고 불안한 내면을 숨기며, 잠시나마 살아 있음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다. 어쩌면 이곳에서 구원의 길을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소설 후반, 늙은 바텐더는 혼잣말로주기도문(主祈禱文)’을 패러디한 기도를 중얼거린다. “하늘에 계신 허무한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허무하게 빛나시며우리에게 허무한 양식을 주시고우리의 죄를 허무하게 용서하시고허무한 주의 이름으로 허무하게 구하소서. 아멘….”

이 주기도문 속에허무(nada)’라는 스페인어 단어가 11번 반복된다. 영어로 쓰인 이 작품 속에 유일하게 등장하는 스페인어는, 의미가 상실한 시대의 절망과 무력감, 깊고 건조한 절규와 허무를 더 강렬하게 꾸미기 위해, 형식만 남아 있는 신앙에 대한 풍자를 더욱 강렬하게 드러낸다.

헤밍웨이는 이 작품에서만 허무를 다룬 것이 아니다. 그의 삶 자체가 허무의 여정이었으며, 그의 문학 전반에 흐르는 핵심 주제이기도 하다.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한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신문기자로 일하다 제1차 세계대전에 자원해 참전했다. 비행기 추락사고로 큰 부상을 입었고, 스페인 내전과 노르망디 상륙작전에도 종군기자로 참여했다. 세 번의 결혼과 이혼, 반복되는 이주(移住)와 정신적 불안. 수많은 술집을 전전하며 외로움과 불안을 잊고자 했지만, 정작 그곳에서 위로를 찾지 못했다. 결국 1961, 네 명의 자녀를 남겨둔 채 스스로 사냥총을 입에 넣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랬다. 그가 즐겨 찾았던깨끗하고 밝은 곳이라는 술집은, 절망과 허무를 잠시나마 잊기 위한 은신처였을 뿐이다. 그곳은 말초적 은둔지 일뿐 구원은 끝내 오지 않았다. 그에게 허무는 단순한 철학개념이 아닌, 온몸으로 겪어낸 실존적 현실이었다.

우리도 그런 술집, 그런 술잔을 찾는 것은 아닐까. ‘딱 한 잔만 더라는 유혹과 미련처럼 돈, 쾌락, 명예 같은 세속적 집착들에 매여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어쩌면 한 잔의 술잔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막고, 습관처럼 쥔 그 잔이 우리의 한정된 삶을 오래도록 붙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중국 선사 조주(趙州)는 이렇게 말했다. “눈앞이 곧 길이다.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하라.” 예수께서도 말씀하신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마음을 새롭게 함으로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12-2)"

이 말씀은 세상의 방식을 본받지 말고 따르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다. 우리가 찾아야 할 곳, ‘깨끗하고 밝은 곳은 성령이 살아 계신 주님이 기다리시는 바로 그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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