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당 2원을 아껴서 고국에 독립자금으로
공덕윤 독립유공자에 대통령 표창
대한인국민회 오학기나 지방회 활동
공적 110년·포상 추서 4년만에 전수
샌디에이고 거주 91세 둘째 아들에
LA총영사관 윤지완 영사 내일 방문
2017년의 일이다. 멕시코에 와하카(Oaxaca)라는 지역이 있다. 수도 멕시코시티에서도 300마일 넘게 떨어진 오지다. 그곳에 낯선 동양인이 도착했다. 그리고는 며칠 동안 특이한 걸 물어보며 다닌다. 그곳 사람들조차 가물가물한 공장 이름이다. “혹시 와하케뇨(Oaxaqueño)를 기억하시나요?”
낯선 이방인은 멀리 ‘코레아’에서 왔다. 김재기라는 이름이다. 전남대에서 정치외교학을 가르치는 교수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가 와하케뇨를 찾는 이유가 있다. 100년 전, 그곳은 꽤 큰 제당(製糖) 공장이었다. 태평양 너머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일하던 곳이다. 에네켄 농장에서 나온 300여 명이 그곳까지 흘러간 것이다. 거기서 사탕수수 농장과 공장 일꾼이 됐다. 김 교수는 이들의 흔적을 더듬고 있던 것이다.
당시 조선에서 온 이주민들은 ‘와하케뇨’를 ‘오학기나’라고 불렀다. 아마 한자식 표기였던 것 같다. 1911년 12월 17일, 작은 모임이 결성됐다. 오학기나 지방회(地方會)라는 이름이다. 2세들을 가르칠 일신(日新)학교 건립을 준비하는 단체다.
오학기나 지방회가 거둔 의연금의 용처는 장학기금만이 아니었다. 고국에 보낼 독립운동 자금도 모으기 시작했다. 대한인국민회의 지방조직 역할까지 맡은 것이다. 당시 조선인들의 하루 일당이 겨우 2원꼴이었다. 입에 풀 칠 하기도 어려운 지경이다. 그 돈을 아껴서 아이들 학교도 세우고, 고국 독립운동 자금까지 보낸 것이다.
김재기 교수팀의 현지 취재를 바탕으로 이들 중 20여 명이 해외 독립유공자로 한국 정부에 추서됐다. 이들 중 상당수가 2017년 건국포장, 대통령표창 등의 서훈을 받게 됐다. 문제는 전달이다. 당사자들은 타계했고, 후손들은 연락이 끊긴 상태라 훈장, 표창을 전할 길이 막막했다.
이들 중 한 명이 공덕윤(1977년 타계·대통령 표창)이라는 독립유공자다. 오학기나 지방회 창립(1911년)을 주도했고, 1926년 1월에는 열성적인 독립운동자금 후원 덕에 ‘임시정부 1호 감사장’을 받기도 했다. 멕시코 메리다 지방회에서 활동하면서 회장, 대의원, 감찰위원 등을 역임했다.
끈질긴 추적을 거쳐 어렵사리 후손과 연락이 닿았다. 고인의 3남 3녀 중 유일한 생존자인 둘째 아들(데이비드 콩 살라스)이 샌디에이고에 거주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LA총영사관 윤지완 영사는 “보훈처의 연락을 받고 올 2월에 표창을 전수하려고 했는데, 여건이 여의치 못했다. 아드님도 91세의 고령인데다, 당시 코로나를 앓고 있어 부득이 미뤄지게 됐다”고 안타까웠던 상황을 전했다.
그리고 드디어 내일(22일), 윤 영사가 샌디에이고로 향한다. 요양원에 있는 전수자를 만나기 위해서다. 독립유공자에게는 둘째 아들을 통해서 110년 만에 고국의 감사한 마음이 전달된다. 그가 그토록 염원하던 독립한 조국의 한가위 다음 날이다.
백종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