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자의 슬픔… "한국전쟁,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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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의 슬픔… "한국전쟁,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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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6·25참전유공자회 최병길(96) 감사가 본지를 방문한 자리에서 한국전쟁 당시 상]긴박했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이훈구 기자


잊혀진 전쟁 6·25 <3>

글 싣는 순서

1. 무관심 속 그들만의 기념식

2. '짐'이 된 참전유공자 수당

3. 끝나지 않은 전쟁


6.25 참전유공자회 최병길 감사의 증언

선봉 통신병으로 평양까지 북진

전우의 죽음 아직 마음속에 남아


“나는 군대를 늦게 갔습니다. 스물 두 살까지 농사만 지으며 살다가 조국이 풍전등화라는 말을 듣고 자원입대를 결심했지요. 남들은 전투병이 아닌 통신병이어서 덜 힘들었을 거라고  말하지만 통신이 마비되면 모든 전투가 마비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극도의 긴장 속에서 임무를 수행해야 했습니다.”

통신병과(通信)는 전쟁 중 떨어진 지휘부와 부대를 연결하는 역할을 맡는다. 전장에서 정보의 흐름은 곧 작전의 생명이기 때문에 통신병은 가장 먼저 도착해 통신망을 설치하고, 가장 나중에 철수하는 병과다. 

올해 96세를 맞은 재미 6.25참전유공자회 최병길 감사(예비역 일등중사)는 그 긴박했던 시절의 기억을 마치 어제처럼 또렷하게 회상한다. 한국전쟁 초기 그는 들판에서 농사일을 돕고 있었다. 전황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전선이 남쪽으로 밀리고 있다는 소식에 더는 외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스스로 목숨을 하늘에 맡기자는 각오로 자원입대 했다.

당시 그는 일본 요코하마에 있는 미 극동군총사령부 훈련소, 일명 ‘캠프 드레이크(Camp Drake)’에서 훈련을 받았다. 이곳은 재일학도의용군이나 카투사들이 훈련받던 곳으로 미국 본토에서 온 신병들도 잠시 머무르던 보충훈련소였다. 훈련을 마친 그는 부산을 거쳐 미 8군단 통신과에 배속됐고, 밀양, 김천, 대전공군학교 등을 거쳐 개성, 사리원, 평양, 신의주까지 북진 작전에 투입됐다. 선봉에 서서 통신망을 구축하고 교신을 담당했다. 평양을 탈환하고 처음 통신이 연결되었을 때 감격은 지금도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곧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역전됐고, 오산까지 후퇴를 거듭해야 했다. 미군에 배속돼 비교적 수월하게 이동했지만 하루 8시간의 근무는 기본이었고, 후방에 있더라도 안심할 수 없었다. 통신병은 빨치산의 주요 타겟이었기 때문이다. 야간에는 한국군이 경계를 맡았는데 이때를 노린 무장공비의 습격이 잦았다. 가설 작업 중 인민군 저격수와 마주치기도 했다.

충주의 본대로 전출 가기 전까지 그는 극도의 긴장 속에 근무했다. 함께 입대한 동료가 전사할 때마다 며칠씩 충격에 시달렸고, 종전 소식을 들었을 때는 환호성만 멍하니 질렀다고 회고한다. 이제 전투가 끝났다는 안도감도 잠시 뿐, 산화한 전우들의 얼굴이 떠올라 기쁨보다 괴로움이 더 컸다고 말한다. 그는 그때 처음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깨달았다고 한다.

10년 간의 군 생활은 그에게 인내와 담대함을 심어줬고, 당시 상관이었던 미군 특무상사와의 전우애는 미국 이민의 길로 이어졌다. ‘일주일만 미국을 같이 구경하자’는 제안으로 시작된 미국 방문은 정착과 자립을 도와준 은인의 도움 덕분에 이내 이민생활로 바뀌었다. 

1984년부터 미국에 뿌리를 내린 그는 전우들과의 연대 속에서 가장 큰 위로를 받았고, 자연스럽게 6.25참전유공자회 활동에도 참여하게 됐다. 그 열정은 지금 감사 직책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매년 6월 25일 한국전쟁 기념식을 맞이할 때면 그의 마음은 더 무거워진다. 

해를 거듭할수록 함께 했던 전우들이 세상을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빈자리가 늘어날수록 살아남은 자로서의 슬픔은 더 깊어진다.

노병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훈구 기자 la@chosun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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