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시니어] 원조 충무로 키즈의 영화인생은 지금도 계속된다
정광석 재미영화인협회 회장의 ‘멋진 인생’
충무로의 황금기를 함께 했던 재미 영화인협회 정광석 회장.
나이는 숫자에 불과 하다는 것을 증명 하듯 정회장의 기억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이야기 할 때면 마치 어제의 일처럼 또렷이 기억을 했다. 감독과 스텝 그리고 주·조연 배우들의 이름은 물론 개봉 날짜와 극장 등을 정확히 기억해 내고 그때 현장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달해 주었기 때문이다.
#. 충무로 황금기와 함께 한 젊은 날
1959년 한달 하숙비만 달랑 들고 서울로 상경한 마산 사나이의 부푼 꿈은 불과 일주일 만에 산산조각이 났다. 이 친구, 저 친구를 만나다 보니 돈도 바닥 났고 서울살이가 만만치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이때 생각난 이름이 배우 ‘이대엽’. 고등학교 직속 선배이면서 의형제였던 그에게 찾아 가니 대번에 오향영화사에 소개를 해줬다. 오향영화사는 유명 작곡가 박시춘(朴是春)선생이 설립 회사로 영화음악가로도 이름을 날리던 중 직접 제작에 뛰어 들었던 터. 제작부에 들어가 보니 당시 충무로의 풍토는 ‘삥땅’이 만연하던 때여서 서로 서로 허물을 덮어주기 바빴다. 그러한 당시 충무로에서 정회장은 ‘정직’과 ‘열심’을 모토로 삼았다. 성실함을 인정 받고 나자 그를 알아 본 배우들이 여기저기서 매니저를 맡아 달라는 제의를 해왔고 문희, 신영균, 윤정희 같은 쟁쟁한 배우들의 매니저로 활동했다. 얼마나 매니저 일을 꼼꼼하게 봐 줬던지 남궁원, 김혜정, 전계현 등에게서도 제의가 들어왔고 제작부장을 겸하다가 결국 제작자의 길로 접어 들었다.
#. 개봉날짜를 칼같이 지킨 ‘싸나이’
그렇게 경력을 쌓은 그는 직접 제작자로 나섰다. 1969년 문희, 윤정희, 신성일 주연의 ‘비에 젖은 두 여인’(이형표 감독)을 시작으로 ‘흐느끼는 두 여인’(이상언 감독, 윤정희, 김지미, 허장강, 최무룡 주연, 1971), 여랑(김묵 감독, 김희라, 오유경 주연, 1971), ‘어디로 가야 하나’(이두용 감독, 윤정희, 최무룡 주연, 1972), ‘인생 우등생’(박호태 감독, 박노식, 신성일, 최무룡 주연, 1972), ‘멋진 인생’(박호태 감독, 남궁원, 신성일, 전계현 주연, 1972), ‘생사의 탈출’(김묵 감독, 신일룡, 신영일, 김창숙 주연, 1973) 등을 제작했다. 이 중 ‘비에 젖은 두 여인’의 경우 제작자가 첫 작품의 경우 5-6개월 소요가 되던 것을 불과 40여일 만에 끝내고도 흥행에 성공한다. 사실 당시 충무로에서 유행 하던 ‘7글자 제목이면 성공한다’는 징크스만 믿고 무조건 밀어 붙였다는 정회장은 당시 충무로에서 ‘무조건 시간을 지켜 반드시 개봉날짜에 맞춘다’는 신뢰를 얻었다. 필름 영화 시절 만연하던 필름 삥땅이나 낭비를 없애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되도록 베테랑 일류배우들을 캐스팅 하여 작품당 1만 3천자를 안 남기는 프로페셔널 한 제작으로 정평이 났다. 때문에 신용이 있어야 받아 올 수 있었다는 ‘코닥필름’을 안정적으로 공급 받아 제작할 수 있었다고.
#. 영화법 4차 개정으로 도미
그런 그에게도 시련이 다가왔다. 1973년 제4차 영화법 개정을 통해 수입영화쿼터제가 만들어져 한국영화 3편당 외화수입권 1편을 배정하게 된 것이다. 영화 제작사들은 흥행이 보장되는 외국영화 수입을 위해 한국영화 3편을 의무적으로 제작했는데 이는 질적 하락을 가져왔고 정회장은 이러한 충무로 풍토에 환멸을 가져 왔다. 검열이 강화되니 상상력의 저하를 가져 오게 되었고 그는 결국 도미를 결심한다. 그리고 AT&T 등에서 근무하며 영화를 잊고 사는가 싶더니 조인 하게 된 것이 ‘재미한국영화인협회’. 처음에는 봉사만 하겠다고 생각했지만 어느새 9대째 계속 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최근에는 자신이 제작한 영화 ‘인생 우등생’을 상영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말하는 좋은 영화란 “무조건 관객들이 보고 호응이 좋은”영화이며 지금도 재미한국인영화인협회의 발전을 위해 젊은 회원들을 물색 중에 있다. ‘살아 있는 한’협회를 위해 봉사할 각오인 정광석 재미영화인협회 회장. 그의 앞으로 행보가 주목된다.
이훈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