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지동마을 숲 속에서
김희식
(주)건축사무소 광장 상무
장흥댐 인근에 자리잡고 있는 지동마을은 댐 건설로 인해 원주민들이 떠난 곳입니다. 지금은 댐 주변에 살았던 실향민을 위한 기념공원이 조성돼 있습니다. 공원 한 가운데는 느티나무 고목이 떡 하니 서 있습니다. 마을을 지킨다는 당산목입니다. 나무둘레 20피트, 수령 520년, 천년의 절반이 지난 느티나무가 지금도 그늘을 선사합니다. 공원 숲에는 각종 자생식물과 야생화 천국입니다.
이름 모를 낯선 식물들을 발견할 때마다 식물도감 앱을 열고, 낯 선 들꽃이나 나무를 이미지로 업로딩(Up-loading)하면서 이름을 익힙니다. 우리 말로 된 독창적인 식물 이름을 대할 때마다 식물학자들께 경탄을 보낼 때가 많습니다. 오늘은 멀구슬나무, 복분자딸기나무, 개망초, 큰엉겅퀴, 만첩빈도리, 마삭줄, 고들빼기, 노랑창포 등의 이름을 마주합니다. 요즘 전국 지자체마다 등나무, 작약꽃, 장미축제 등 각종 꽃 박람회가 성황을 이루고 있습니다. 작년에 열렸던 ‘순천만 국제정원 박람회’ 이후, 최근에는 뚝섬 서울숲에서 ‘2024 국제정원박람회’가 성황리에 공개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살림집들은 마당이 달려있는 단독주택이 아닌 70% 이상이 공동주택인 아파트가 주 생활문화권입니다. 콘크리트 밀림 속에서 흙을 밟고 살기 어려운 주거환경 때문인지 정원이나 녹지조성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부쩍 늘었습니다. 지난 주말,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라는 타이틀로 열리고 있는
조경가(造景家) 정영선의 프로젝트 전시회에 다녀왔습니다.(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정영선 선생은 1970년대 한국의 국토개발과 함께 전격 도입된 국토개발 여성 1호 기술사입니다. 조경분야의 선두주자로서 여전히 현역으로 80대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죠. “정영선에게 조경은 미생물부터 우주까지 생동하는 모든 것을 재료로 삼는 종합예술이다. 삼천리 금수강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자 했다. 그녀는 서양에서 유래한 조경(Landscape architecture) 개념을 한국의 대지와 경관에 맞게 번역해냈다”라는 평가도 받고 있죠.
반 세기에 걸쳐 정영선이 진행한 프로젝트 중 60여 개를 골라 500여점 자료를 유리바닥에 펼쳐놓은 형식의 색다른 전시형식이 관람자들의 발길을 멈추게 합니다. 파스텔,연필 등으로 그린 초기 기본계획 스케치, 수채그림, 청사진, 설계도면, 모형, 사진, 영상, 아카이브 등 각종 기록자료를 한 곳에서 조망할 수 있었습니다. 아시아공원(1986), 올림픽선수촌 아파트단지(1988), 한국종합무역센터(1987), 예술의전당(1998), 인천국제공항(2001), 국립중앙박물관(2005), 호암미술관 정원, 여의도 샛강 생태공원(2007), 파주출판단지 경관계획(2014), 경춘선 숲길(2015) 등 주요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얼마 전 모 TV방송에서 MC 유재석과 함께 게스트로 출연한 정 선생의 인터뷰 중 인상적인 장면이 기억납니다. 그녀가 진행했던 서울 아산병원 녹지조성에 관한 대화 내용입니다. “병원에는 질병으로, 혹은 사고로 다친 사람들이 많이 옵니다. 환자든, 보호자든, 의료진이든 얼마나 어려운 일이 많겠습니까. 아산병원 녹지공간도 그런 사람들을 위해 설계했습니다. 조용히 쉬고 싶을 때, 울고 싶을 때. 걷고 싶을 때 찿아갈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고 싶은 마음으로 프로젝트를 계획했습니다. 단순한 식재 디자인이나 공간배치뿐만이 아니라 삶을 위한, 영혼 치유의 공간으로 녹지를 계획했습니다. 조경사는 연결사입니다. 사람과 경관과의 관계, 건축과 도시, 나아가 대지와의 관계를 해석하고 연결합니다”라는 대목입니다.
최근 ‘대형 프로젝트 매니지먼트’ 분야의 권위자 벤트 프르비아의 ‘프로젝트 설계자’(한경 BP, 2024)’ 중에 ‘프로젝트의 실패 원인’이 나옵니다. 프로젝트 목표달성 실패사유로 1) 경험부족 2) 즉흥적인 독창성 3)천천히 기획하지 않고 땅부터 파고 보자는 방식 4) 반복적 실험작업 결여 등을 꼽았습니다. 반면, 성공요인으로는 큰 덩어리를 잘게 나눈 뒤(Breakdown) 모듈화 합니다. 다시 작은 모듈들을 합쳐 큰 덩어리로 통합하는 방식을 권장합니다. 다수의 대형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정영선 선생의 작품들을 돌아보면서 위의 조건들이 충실히 반영된 결과라는 생각도 듭니다. 한 그루의 나무, 풀 한 포기, 작은 바윗돌 한 점 배치도 소홀함 없이 임하는 ‘조경 프로젝트 달인’이 갖고 있는 ‘디테일의 힘’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동마을 숲을 걷고 있는 데, 갑자기 풀섶에서 꿩 한마리가 푸드득 놀래키며 날아갑니다. 5월의 마지막 주말 아침, 햇살도 찬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