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칼럼] 희망의 돋을볕 가득한 2023년을 바라며
진유철 목사
나성순복음교회 담임
‘돋을볕’의 사전적 정의는 ‘아침에 해가 솟아오를 때의 햇볕’이다. 다사다난했던 2022년을 뒤로 하고 이제 2023년이 시작되었는데, 미래와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돋을볕의 은혜를 더 크게 누리는 새해가 되시기를 기원드린다.
그러나 작금의 세상 현실은 그렇지 않다. 공동체의 미래와 사람들의 희망보다는 당장 현실 문제에 매여서 남의 탓하기에 급급하다. 국가의 지도자들조차도 패배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하고 승자에게 덕담은커녕 비난과 저주 퍼붓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세상 리더들은 틈만 나면 상대의 흠을 찾아 공격하는 태클걸기와 내편 챙기기에만 정신이 없다. 참된 미래와 희망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나라와 개인은 언제나 미래와 희망에 초점을 둔다. 긍정적인 분위기 만들기에 우선순위를 둔다는 말이다. 좋은 실례가 있다. 미국과 온 세계에 큰 충격과 상처를 안겨주었던 9.11테러 사건이 벌어졌을 때 시신을 보여준 방송이 없었다. 부정적인 충격을 주지 않으려는 배려였다. 현장에는 도둑들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누구도 그런 부정적인 것에 초점을 두고 보도하지 않았다. 그건 은폐가 아니었다. 공동체 전체를 생각하는 친절이며 미래를 향한 배려였다.
대신에 여러 헌신적인 소방대원들과 경찰들을 영웅으로 그리며 보도했다. 그래서 911 사태 수습과정에 수많은 미담 사례들이 전해진 것은 이런 철학과 배려가 담겨 있는 것이다. 이런 희망의 소식들을 들으며 미국은 물론 온 세계가 상처를 극복했다.
문제를 들추어 내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문제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으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영웅적인 헌신에 초점을 맞추고 희망의 소식을 전하고 희망의 소식을 유통하는 것이 진정한 회복의 길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희망을 말하는 곳에 희망이 있다. 희망에는 치유와 회복이 있다. 왜냐하면, 희망에 생명력이 있기 때문이다.
희망만이 절망의 현실에도 무릎 꿇지 않고, 분명한 기대와 소원을 갖고 앞의 푯대를 향해 나아가게 하는 힘이 있다. 부패와 타락이 가득 찬 세상 속에서 종교개혁을 시작한 마틴 루터는 “성공하는 사람은 언제나 가슴 속에 희망의 등불을 켜는 사람이다”라고 외쳤다. 또 셰익스피어는 “불행을 치료하는 약은 희망밖에 없다”라고 했다.
그런데 인간의 뇌는 놀랍게도 두 가지 반대 감정을 동시에 가질 수 없다고 한다. 쉽게 말해 사람의 머리에는 오직 한 의자만이 놓여 있어서, 절망이 앉아 있으면 희망이 함께 할 수 없고 희망이 차지하면 절망이 함께 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희망이 있는 사람과 절망에 붙잡힌 사람과는 극복할 수 없는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
여러분은 희망과 절망 중 어느 의자에 앉아서 2023년을 맞이하고 있는가? 십자가로 죄 사함의 길을 여시는 예수님, 우리를 사랑하여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참된 미래와 희망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2023년을 시작하며 참된 희망의 돋을볕을 체험하는 은혜가 더욱 풍성하기를 소원한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