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내 인생에 이름 석자는 남겨야지요”
센터메디컬그룹을 한인 커뮤니티 최고의 메디컬그룹으로 만들겠다는 큰 꿈을 꾸고 있는 제이 최 대표가 당당한 모습으로 포즈를 취했다.(위) 제이 최 대표가 최근 미주조선일보LA와 인터뷰하면서 한인 의료계 현실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센터데미컬그룹 제공
센터메디컬그룹 제이 최 대표
메디컬 분야 독보적 한인 전문가
“직영병원 갖춘 메디컬그룹 소망”
의료체계 알리려 팟캐스트도 운영
"젊은 전문의 유입 분위기 조성해야"
한때 노숙자생활, 오바마케어 시행 때
대학전공(CS) 살리며 인생역전 발판
센터메디컬그룹 제이 최 대표. 그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며 잠깐, 아주 잠깐 스쳐 간 노랫말이 있다. 속으로 흥얼거렸으니 최 대표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 둬야지~.’ 가왕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 최 대표가 딱 그런 말을 했다. “인생을 살면서 이름 석자는 남겨야지요.”
그는 꿈을 이야기했다. 올해로 헬스분야에 종사한 지 28년 차. 그 세월 동안 꿔 온 오랜 꿈이라고 했다.
“한인 환자와 의사들 모두에 도움이 되는 한인커뮤니티를 위한 메디컬그룹을 세우고 싶습니다. 현재 미주 한인사회에서 메디컬그룹이라고 일컫는 것들은 IPA(Independent Physicians Association) 입니다. 일종의 의사조합이죠. IPA와 헬스플랜 그리고, 제대로 된 직영병원이 갖춰져야 진짜 메디컬그룹이라 할 수 있어요.”
최 대표의 롤모델은 ‘카이저 퍼머넌트(Kaiser Permanente)’ 이다. 오클랜드에 본사를 둔 카이저 퍼머넌트는 2023년 기준으로 40개 종합병원과 618개의 메디컬센터, 2만4600명의 의사와 7만3600명의 간호사를 두고 있다. 카이저 퍼머넌트는 영리적 운영도 하지만 수익을 조직에 환원해 조직과 멤버들을 위해 재투자하는 ‘not-for-profit(NFPO)’도 운영한다.
최 대표가 꿈꾸는 메디컬그룹 모델로 카이저를 언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무보험자에게도 헬스케어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LA 버몬트와 올림픽길에 있던 ‘고려보건소’와 같은 시설운영이 바로 NFPO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센터메디컬그룹은 올해로 만 10년을 맞았다. 시니어 전문 메디케어 HMO로 4200명의 소속의사, 8000여 명의 가입환자를 보유하고 있으며 80여 대형병원과 연계해 미주에서는 가장 빠른 수준의 2시간 내 리퍼럴 승인을 자랑한다. 어느 정도 안정 단계에 접어들었지만, 최 대표는 “큰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이제 시작일 뿐” 이라며 겸손해 한다.
최 대표는 2년 전부터 이중언어가 가능한 젊은 의사들을 영입해 직영병원을 늘리기 시작했다. 2022년 오렌지카운티 풀러튼에 1호점을 냈고 지난해에는 가든그로브에 2호점을 냈다. 현재, 어바인과 애너하임에 3호, 4호 병원을 준비 중이다. 그렇게 직영점을 늘려가면서 진정한 메디컬그룹, 한인 커뮤니티 기반의 ‘카이저’로 성장해 간다는 계획이다.
최 대표는 요즘 메디컬 비즈니스와 별도로 유튜브와 팟캐스트에도 새롭게 신경쓰고 있다. 부에나파크 소스몰에 있는 커다란 사무실의 스튜디오 한 켠에 방송장비를 들여 놓고 테스트를 하고 있다. 한인 환자와 의사들에게 미국의 의료시스템에 대해 알리기 위함이다. 7월께면 본격 방송을 하게 된다.
“일반인은 물론이고 의사들조차 미국의 의료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많이 부족합니다. 메디컬 고지서가 날아왔는데, 본인분담금으로 평소 50달러를 냈는데 갑자기 200달러를 내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왜 그런지 누가 알려주지도 않고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기에 십상이죠. 실제로 우리 직원이 그런 일을 당했고, 그것을 해결하는 데 1년이 걸렸어요. 안 되겠다 싶었지요. 알려야겠다 싶어서 이제 막 시작했습니다.”
최 대표의 유튜브, 팟캐스트 운영은 또 다른 계기도 있다. 최 대표는 지난해 서울메디컬그룹이 뉴욕의 어센디스그룹에 지분매각을 하는 과정에서 화제가 된 capitation(인두세)을 예로 소개했다.
“인두세라는 것은 IPA와 보험사 간의 거래입니다. 보험사는 환자 1명당 IPA에 인두세로 일정액(1000달러)을 줍니다. 이를 가지고 의사들은 환자 상담과 치료를 하고, 남는 것으로 의료 관련 계몽 등 아웃리치 활동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한인 IPA들끼리 경쟁하는 바람에 이 금액이 400~500달러로 터무니없이 낮아졌습니다. 그마저도 어떤 IPA 운영진은 소속의사들에게 더 적은 돈(50달러) 밖에 주지 않습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져도 의사들은 잘 모르기도 하고, 알아도 저항을 하지 못하더라고요. 센터메디컬에서 이를 바로 잡으려고 몇 차례 노력도 해봤지만, 저항에 부딪히고 말았죠.”
중국이나 베트남 커뮤니티에도 IPA가 있고 그들은 보험사들로부터 받아낼 것을 모두 받아내서 커뮤니티 경제 활성화에 이바지하는 것을 보면서 교육과 계몽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히 느꼈다는 게 최 대표의 말이다.
“앤섬블루크로스 같은 보험사들의 경우, 중국계 IPA를 만나기 위해 대표가 동부에서 전용기를 타고 날아와 정중하게 계약을 하지만, 한인 IPA는 지금 같은 경쟁구도라면 절대 그런 대접을 받을 수 없습니다.”
최 대표는 센터메디컬의 경우, 보험사로부터 받은 인두세 전액을 소속 의사들에 전달하고 그룹차원의 아웃리치 활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고 밝혔다. 센터메디컬은 커뮤니티 장학사업은 물론, 가입환자를 대상으로 건강세미나, 무료검진 개최 외에도 환자들의 건강한 활동을 위해 스포츠, 오락, 1일관광 등도 시행하고 있다.
그룹 차원에서 스포츠댄스클럽, 뇌건강정신센터 운영을 준비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특히, 뇌건강정신센터는 치매검진과 치료를 위한 비싼 장비를 구입해야 하기에 보드멤버들의 반대도 있지만 최 대표가 계속해서 설득작업을 통해 절차를 진행 중이라고 했다.
“수익의 일부를 커뮤니티에 환원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커뮤니티가 건강해야 헬스 비즈니스도 유지하는 것이니 결국 상생모델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의료 비즈니스는 사실 전문가들도 진입하기 쉽지 않은 분야다. 용어가 생소한데다 이해하기도 어렵다. 최 대표는 어떻게 그런 분야에서 성공을 달리고 있는 걸까?
12살 때 가족이민 온 최 대표는 대학 때도 의료와 상관없는 컴퓨터 사이언스를 공부했다. 심지어 대학 때는 삼촌과 함께 페인트 칠하는 회사를 운영했다. 사업수완이 좋아 일감 수주는 많았지만 대금 받는 게 좀처럼 쉽지 않았다. 결국, 최 대표는 사업을 접고 6개월을 놀던 끝에 신문광고를 보고 도심의 한 회사에 취직했다.
“레이저 장비를 세일한다는 회사였는데, 매일 시키는 일은 타이핑 하는 게 전부였죠. 그래도 자꾸 일을 하다 보니 용어는 어려웠지만 관심이 가더라고요. 그때부터 업무가 끝나면 도서관으로 달려가 인터넷을 뒤지며 메디케어 분야를 공부했습니다. 당시엔 한인이 그런 공부를 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어요.”
이후 최 대표는 독립해 메디컬 빌링회사, 메디케어 컨설팅과 감사, 병원 셋업 등 동시에 여러 일을 하면서 입지를 다졌다. 돈이 제법 벌리자 최 대표는 와이프 요청으로 꽃가게를 냈다.
“처음부터 꽃가게도 아주 잘 됐어요. 한 달만에 또 다른 가게를 낼 정도였지요. 그 당시 한 달에 2만~3만 달러를 벌었으니 20대 젊은 나이에 겉멋이 들만도 했지요.”
최 대표는 사실 운동과 ‘잡기’에 모두 능한 ‘만능인’이다. 어려서부터 배운 바둑은 아마 6단 수준. 고교시절엔 유도까지 익혔다. 당구, 골프, 승마, 스킨스쿠버까지. 최 대표는 매일 일과 후에는 젠틀맨클럽이라는 스포츠 바에 들렀다. 월요일 당구, 화요일 골프, 수요일 승마, 목요일 스킨스쿠버, 금요일 바둑…, 그러다가 ‘이제 일 안 해도 돼’라는 생각이 들자 메디컬 관련 일을 정리했다고 했다. "꽃가게만 해도 됐는 걸요."
하지만 인생이 어디 생각대로만 흘러갈까. “아마도 그때가 2002년이었을 거예요. 닷컴버블이 터질 때였죠. 하루가 다르게 꽃가게 매상이 줄기 시작했어요. 시중에 유동성이 줄면서 사람들은 꽃 사는 것부터 줄였고 그렇게 한 3개월쯤 지나니까 아예 안 사더라고요. 꽃은 재고라는 것도 없잖아요.”
삶이 급전직하했다. “28살 나이였어요. 순식간이더라고요. 집도 절도 없는 상황이 됐어요. 수십 만달러 되는 빚도 갚을 길이 막막했지요. 그 길로 집을 나와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노숙자 신세가 돼 있더라고요.”
그래도 왈칵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지인의 도움으로 와이프는 살던 집에 쫓겨나지는 않았다. “어느 날 노숙하는 곳으로 어떻게 알았는지 와이프가 찾아왔어요. 그렇게 해서 집으로 돌아가게 됐지요.”
최 대표에게 재기의 발판이 된 것은 다시 메디컬 분야였다. “뭘 하면 좋을까 궁리 중이었는데 당시 올림픽 길에 있는 하나병원 이종석 원장이 ‘같이 일하자’며 연락을 줬어요. 메디컬 감사 업무였는데 그때만 해도 그런 일을 할 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던 때 였어요. 다시 착실하게 일을 했고 꽃가게 하면서 진 빚을 깨끗하게 정리했어요. 그런 과정에서 예전에 알던 의사와 의기투합해 병원을 열게 됐고 내과, 소아청소년과, 물리치료 등 병원 수를 늘려나가면서 다시 일어날 수 있었어요.”
최 대표 인생의 또 다른 전기는 2009년 오바마케어(ACA) 시행이었다. 돈도 조금 모았을 때라 삶이 다시 느슨해 지려 했을 때, 오바마케어는 최 대표에게 새로운 흥밋거리를 제공했다. “오바마케어 관련 문서를 조금씩 보다 보니까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1만 페이지가 넘는 문서를 공부하다 보니 새로운 판도도 보이더라고요.”
최 대표가 찾은 새 판도? ACO(Accountable Care Organization) 였다. 환자 치료비용을 낮추기 위해 의사, 병원, 헬스케어 프로바이더가 네크워크화 해서 함께 일하는 조직.
그때부터 최 대표는 하던 일을 다시 한 번 정리하고 개인 사무실을 냈다. 먼저, 팀을 꾸려 메디컬차트(HER) 만드는 일에 올인했다. 의사들이 진료하고 처방할 때 손으로 쓰던 글씨로는 오바마케어 시행으로 환자가 더욱 늘어났을 때 감당이 어려운 일이었다. 이를 전자식으로 바꿔 편리하게 사용하도록 하는 프로그램이 HER 이었다. 대학 때 컴퓨터 사이언스 공부한 실력이 발휘됐다. 그렇다고 ‘뚝딱’하고 만들 수는 없는 일.
“이전에 하던 병원의 지분을 팔고 후배들에 나눠주면서 싹 정리하고는 오로지 HER 만드는 일만 했어요. 집에도 안 가고 사무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일하는 재미에 푹 빠졌던 때였지요. 그렇게 2년 걸려 미국 내 한인으로는 처음으로 HER을 만들어 보급했습니다.”
최 대표는 HER를 완성한 후에는 ACO 사업에 도전했다. 캘리포니아주에 할당된 13개 라이선스 중 5개를 획득해 관리하면서 많은 돈을 벌었고, 그를 발판으로 지금의 센터 IPA를 세워 꿈을 향해 나가고 있다고 했다. “중간에 동업자들의 배신으로 몇 번의 고비가 있었고 시간이 지체됐지만 그래도 이젠 전진하는 일만 남았네요.”
최 대표는 한인타운에 젊은 한인의사가 부족해 안타깝다는 말도 했다. “기존 IPA들이 카르텔을 형성해 젊은 의사들이 협조하지 않으면 버티지 못하게 하는 분위기가 있다”며 “몇 년만 더 흘러도 한인타운에 의사, 특히 정신과 같은 특수분야 한인 전문의들은 더는 없을 수도 있어요. 그런 상황은 막아야 하는데…”
돈을 더 들여서라도 최 대표가 한인타운에 젊은 한인의사들을 소개하고 영입하려는 것도 그런 이유라고 했다. “물론, 그들 중에는 기대를 저버리는 의사도 있어요. 남들은 배신이라고 하던데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어쨌든 젊은 의사들이 나로 인해 한인타운에 들어와 머물 수만 있다면 한인 커뮤니티엔 좋은 것 아닌가요.”
김문호 기자 la@chosun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