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우 근 변호사

숙명여대 석좌교수/ PEN.KOREA 인권위원장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크리스마스 시즌이다. 예수는 탄생할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2천 년 동안 각 시대의 정치적·사회적·문화적 염원을 담아내는 상징처럼 인식되어왔다. ‘하나님의 독생자, 사람의 아들, 천지창조의 로고스, 선한 목자, 세상의 빛, 신(神)의 어린 양, 생명의 떡, 길과 진리와 생명…’ 이러한 성서의 다의적인 호칭이 예수에 대한 갖가지 해석을 낳은 것일까? 

‘삼위일체의 제2위격인 성자’라고 이해하는 전통신학 외에도, ‘하늘을 떠나 이 땅에서 삶의 진실을 위해 고난받은 하나님의 아들(D.Bonhoeffer), 십자가의 죽음이 아니라 부활로 구원의 역사를 펼친 하나님의 현현(顯現)(G.Bornkamm), 인간을 통한 절대정신의 자기실현’이라는 이해(G.Hegel)가 나왔다. 

반면에, 신앙의 그리스도는 역사적 예수가 아니라는 비신앙적 이해도 적지 않다. ‘역사적 실재가 아닌 종교적 창작물(J.Crossan), 역사적 추적이 불가능한 설화의 주인공(A.Schweitzer), 위대한 종교적 선각자 중의 한 사람(E.Renan), 신격화된 사람의 아들(R.Bultmann), 인류의 이상을 인격화한 신화(D.Strauss)’라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심지어 ‘예수는 사람이 아니라 1세기에 중근동에서 종교적 집단환각을 일으킨 독버섯의 이름’이라는 엉뚱한 추측까지 등장했다. 

각 시대는 지난 20세기 동안 바람직한 예수상(像)을 제멋대로 만들어냈지만, 가장 큰 논란거리는 예수를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가두려는 정치적 상상력이다. ‘사회주의 혁명가(E.Bloch), 왜곡된 사회구조를 타파하는 소외된 약자들의 해방자(G.Gutierrez), 특정인이 아니라 집단으로서의 민중 그 자체(민중신학), 천국의 속임수로 인간을 오류에 빠뜨린 프롤레타리아의 해독(K.Marx)’이라는 정치적 해석들이 제기되었다. 

그렇지만 예수는 어떤 이데올로기에도 사로잡히지 않는다. 그의 하나님 나라는 특정한 정치체제로 작동되는 영역이 아니다. 모든 정치권력·종교권력의 오만과 위선을 꾸짖으며 가난한 자, 억눌린 이들의 존엄성을 일깨우는 하나님 나라다. 예수의 성육신은 신(神)이 인간의 역사와 고통을 관조하는 초월자가 아니라, 그 역사와 고통을 인간과 함께 겪는다는 현실적인 뜻을 품고 있다. 따라서 성탄은 정치적 무관심을 가르치지 않는다. 권력의 폭력에 침묵하는 종교는 성육신의 뜻에 어긋난다. 또한 특정 정치체제나 사상을 찬양하는 것 역시 성탄의 의미를 왜곡하는 것이다. 

성탄은 지배하는 권력이 아니라 섬기는 헌신을, 사랑과 용서의 초월적 윤리를 펼쳐낸다. 성탄은 ‘이 세계의 현실에 신이 어떠한 방식으로 개입하는가’라는 물음에 분명히 대답한다. 식민지 유대 땅 베들레헴의 초라한 마구간, 광야의 이름 없는 목자들, 먼 이방에서 건너온 동방박사… 이 모두는 하나님의 높은 영광이 인간의 낮은 자리에 침투하는 성육신의 비밀을 드러낸다. 가난하고 억눌리고 고통받는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시선이 우리의 현실 속으로 들어온다. 

성육신은 ‘신의 자기 비움’이다. 성육신의 몸은 정치적 탄압, 구조적 폭력의 대상이 된다. 실제로 예수의 몸은 정치와 종교의 사슬에 묶여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러나 그 사슬은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옥죄지 못했다. 사제의 예복을 걸친 적이 없는 예수는 종교사범으로 고발되었지만 종교의 차원 너머에 있었고, 독립투쟁을 이끈 적이 없는 그는 정치범으로 처형되었지만 정치의 영역을 초월해 있었다. 

가난하고 무식한 하층민들, 방탕한 여인, 부패한 세리가 그의 벗이었고,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살인강도 한 사람이 그의 마지막 친구였다. 식민지를 약탈하는 로마의 제국주의, 정의와 도덕을 비웃는 정치권력과 종교권력, 약자를 짓밟는 불의한 경제, 정신을 오염시키는 사상과 이념… 그 짙은 어두움 속에서 예수는 오직 충만한 사랑, 소망 가득한 영혼의 나라를 선포했다. 메시아의 칭송을 받지 못했던 예수는 2천 년 동안 '메시아의 이름을 지닌 유일한 인격'으로 인류의 마음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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