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실의 세상 읽기] 시절인연(時節因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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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실의 세상 읽기] 시절인연(時節因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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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정 실 (문학평론가)

 

이형기(1933~2005) 시인의 시() ‘낙화는 이렇게 흩날린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봄 한 철/격정을 인내한/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분분한 낙화/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지금은 가야 할 때/…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헤어지자/섬세한 손길을 흔들며/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낙화 중에서)’.

이 시의 첫 마디는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이다. 불가에서는 이런에 대해 시절인연(時節因緣)이라 말한다. 이 시가 오늘의 우리에게 더 뜨겁게 다가오는 이유가 있다. 그 반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현대사회의 왜곡된 욕망 때문이다. 꽃은 피어야 할 때 피고, 질 때가 오면 아무런 미련 없이 떨어지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

오늘의 사회는 이시절인연의 상실에서 비롯된 혼란으로 곳곳에 상처나 있다. 정치는 이미 인연이 다한 권력의 연장을 위해 막말과 진흙탕 싸움이 일상이 되었고, 금융은 현실보다 욕망이 앞선 투기로 흔들리며, 우리 일상의 심리와 관계마저도를 모르는 집착으로 무거워진다. 물러설 때 물러서지 못하는 리더, 책임의 때가 지나도 자리를 놓지 않으려는 구조, 손해를 보더라도 손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인간의 마음모두가 제철을 잃어버린 사회의 단면이다.

정치에서는퇴장의 미학이 사라졌다. 이미 국민의 신뢰를 잃었음에도 공기를 읽지 못하는 엉뚱한 소리를 하는 지도자들이 있다. 그들의 모습은 시인이 말한아름다운 뒷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떠나지 않음으로써 더 큰 혼란을 남기고, 공동체의 시간을 지연시키며 시절인연을 붙잡아 끌고 가려 한다. 금융시장도 다르지 않다. 이미 꺼져가는 호황기 및 코인투자에도이번만은 예외라는 자기기만으로 더 큰 위험을 키운다. 버블이 무너지는 순간마다 드러나는 것은 제때 손을 떼지 못한 인간의 심리다. 탐욕은 때를 분간하지 못하게 만들고, 결국 꽃잎처럼 가볍게 떨어질 수도 있었던 결말을 돌이킬 수 없는 상처로 바꿔버린다.

인간관계와 심리도 마찬가지다. 끝난 인연에 연연하며 자신을 소모하고, 더 이상 자신의 계절이 아닌 곳에 억지로 머무르려 한다. 자신에 대한 적당한 시기를 놓쳤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은 고통스럽지만, 그 인정이 새로운 계절로 나아가는 문이 된다는 단순한 진리를 잊는다. 이렇게 시절인연은 단순한 운명이 아니라때의 흐름을 읽는 지혜. 자연은 때가 되면 흐르고 꽃은 때가 되면 피고 진다. 인간만이 때를 거스르며 자신도, 세상도 힘들게 만든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전도서 3:1) 성경이 오래전부터 말해 온 이 단순한 진리는, 자연과 인간이 다른 지점이 어디인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자연은 제때 흘러가지만, 인간은 그를 알지 못하고 거스르며 스스로를 괴롭힌다.

오늘 우리의 시대가 다시 배워야 할 것은 어쩌면 거창한 개혁이 아니다. 자연이 오래전부터 보여주던 단순한 진리다. 피어야 할 때 피어나되, 질 때가 오면 미련 없이 내려놓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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