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시니어] 지친 LA 코리아타운 위로하는 기타의 선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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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 시니어] 지친 LA 코리아타운 위로하는 기타의 선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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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리스트 박강서

 

LA 코리아타운을 대표하는 ‘3대 기타리스트를 꼽자면 모두들 주저 않고 박강서, 이승희, 최동남을 들 수 있다. 그 근거가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모두가 인정할 대목이다. 강계현의 템페스트’, ‘김도향 밴드같은 실력파 그룹에서 활동했고 LA 코리아타운의 상징과도 같은 내 사랑 코리아타운을 불렀다면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가 없을터. 게다가 팬데믹으로 지친 동포사회를 기타 선율로 위로하기 위해 기꺼이 무대에 선 것도 바로 그였다.

 

#. 기타가 좋아 시작한 음악인생

그의 음악 인생은 고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인생에 운명처럼 다가온 기타를 배우고 열심히 연습하며 언젠가는 무대에 서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살던 어느 날 미8군에서 뮤지션으로 일하던 선배가 함께 일하던 기타리스트에게 사정이 생겼다며 갑작스럽게 대신 무대에 서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된 것. 비록 가발을 쓰고 서야 하는 미8군 무대였지만 첫무대에서 느꼈던 그 황홀함에 발목이 잡혀 지금까지 무대에 서게 되었다. 1993, ‘나의 20’, ‘잊게 해주오등의 히트곡을 낸 가수 장계현 과 함께 그룹 템페스트의 활동을 시작한 이래김도향 밴드에 발탁돼 보컬과 리드기타를 맡았을 정도이니 실력이야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최백호, 이동원, 송창식, 윤형주, 4월과 5, 임지훈, 유익종, 인순이, 채은옥 등 당대 최고의 뮤지션들과 인연이 되어 그들의 콘서트 때 백밴드로 맹활약했다. 한국에서 20년간 1000명 이상 오는 공연을 500회 이상 백밴드로 활약했고 지난 2010년에는 새 프로젝트 팀을 결성,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한 노래 힘을 내라 친구들아를 발표하기도 했다.

 

#. 내 사랑 코리아타운

미국에 오기 전까지 수많은 콘서트에서 라이브 연주를 한 덕택에 미국에 와서도 그의 음악 활동은 계속될 수 있었다. 화려했던 경력들을 뒤로하고 미국에 오게 된 건 남은 힘을 팝의 본고장이라는 미국에서 써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재능기부도 많이 했지만 그가 타운에서 알려지게 된 결정적 계기는 바로 내 사랑 코리아타운이었다. 한인타운을 상징하는 노래 내 사랑 코리아타운은 문화공연기획사 에이콤의 이광진 대표와 김영균 교수의 합작품으로 한인사회에 위로와 응원의 바램을 담았다. 과연 누가 이 노래의 보컬을 맡을 것인가가 초미의 관심사였는데 ‘애비 밴드’(Abby Band)의 보컬리스트 티나 원과 박강서 기타리스트가 부르게 된 것. 이때부터 그는 한인사회의 무대에 비로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 위로의 기타 그리고

그가 좋아하는 게리 무어가 마치 기타가 우는 듯한 특유의 플레이로 세상에서 가장 슬픈 기타를 쳤던 연주자로 기록되었다면 박강서 기타리스트는 위로의 기타라고 할만하다. 마치 지친 영혼을 달래주듯 선을 보듬어 주면서 부드럽게 기타를 치는 것이 그의 장기다. 어느 공연에 가든지 그의 레퍼터리는 위로가 담긴 곡들이 주를 이룬다. 마치 전 세계적으로 위로의 찬가라고 불리는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2 3악장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서정성 넘치는 선율과 같다고나 할까. 하지만 그에게도 아쉬움은 있다. 늘 무대에 서지만 음악적 발전에 대해 갈급 해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온화한 성품과 미소의 소유자인 그는 무대에 설 때도 다른 연주자들과의 조화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그의 음악에 대한 지론은 특별하다. 음악이라는 것은 누가 하라고 해서 하는 게 아니고 뭔가 자신에게 계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 스스로 기타 하나만 있으면 된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했던 자신의 과거처럼 음악인의 길을 걷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계기를 마련해 주고 싶은 바램으로 그는 오늘도 크던 작던 무대를 만들어 누군가와 연주를 함께 해 나가고 있다.

이훈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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