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시니어] 취재 현장이 있는 한 오늘도 현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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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 시니어] 취재 현장이 있는 한 오늘도 현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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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년간 TV 카메라와 함께 한 최창준 감독

 

최창준 감독은 1930년생이며 올해로 96세다.

그는 한인사회 언론‧방송의 산증인으로 매년 최고령 기록을 깨고 있을 만큼 아직 현역이다. 이곳 남가주 지역의 현장 곳곳을 누비며 영상 취재를 하고 있으며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그의 고향은 지금은 북한 땅이 된 경기도 개성. 고려의 도읍이었기에 아직도 선죽교 같은 유적들이 눈에 선하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최 감독은 6.25 사변이 일어나던 날 아침을 잊지 못하고 있다. 38선 경계인지라 포탄이 자주 날라오는 전방 지역이었지만 그날 아침에는 아예 인민군들이 시내에 들어와 있더란다. 928 서울 수복 후 부산으로 내려가 입대하여 1951 2 10일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전방에서 근무 후 대위로 전역한 한국전 참전유공자중 한 분이다.

 

#. 월남전 종군기자로 활약

제대 이후에도 사진 관련 일을 하던 최감독은 유엔군 산하에서 미극동군(미태평양군) 발행, 월간잡지 자유의 벗의 제작에 참여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월남전 종군기자로 나가 전 전투지역을 돌면서 취재활동을 벌였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사선을 넘나들며 기자로서의 사명을 다한 보람된 순간이었다. 당시 한국의 언론사들이 열악하여 필름을 많이 아껴가며 촬영해야 했는데 종군기자는 비교적 풍족한 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사진과 더 깊은 인연이 되어 사진 콘테스트에서 수상하기도 했다. 이후 1976년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되었고  버지니아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면서 부터는 방송에 대한 일을 시작했다. 1983 KBS KTE라는 이름으로 LA에 들어와 일주일에 1시간 방송하던 시절 그는 공중파 채널에 매일 주중에는 1시간, 주말에는 2시간씩 한국어 방송을 했다. 미주 지역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방송한 것이다. 당시에는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라 뉴스를 LA에서 속달로 받아 한국 뉴스를 방송했고 현지에서 대담, 행사 같은 것을 취재하는 현지 프로그램 제작 방식으로 나머지를 채웠다. 그는 그 시절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한다. 편집한 방송 테이프를 송신소에 시간 맞춰 가져다줘야 하는데 안개가 많이 끼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단 1미터도 보이지 않는 길을 산 꼭대기까지 달려가 전달했음에도 단 1건의 사고가 없었으니 기적 같은 일이었던 것. LA에 와서는 인터넷 방송(온라인 스트리밍)을 누구 보다 먼저 시작한 선구자였다. 이러한 공로로 지난 2021년에는 LA에서 활동하는 방송기자들의 모임인 한인방송기자협회에서 6회 올해의 우수 기자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 열정과 혼을 담은 사진 그리고 북한인권

그의 사진은 열정과 혼이 담겼다는 평가를 받는다. 종군기자 출신 답게 순간 포착으로 희로애락의 순간을 잡아 내는 것이다. 또한 그는 초고령 LA평통의 홍보분과위원장을 역임한 바 있다. 이에 대한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을 만큼 평통의 위상을 높이는 일에도 열심이었다. 이러한 열심은 재미남가주이북도민총연합회 활동 당시 남북통일 기원 망향제를 개최해 실향민들의 한을 풀어준 인연과도 맥이 닿아 있다. 그 자신 실향민이기 때문에 미주 한인 이산가족과 탈북자들을 위한 봉사 그리고 북한인권개선에도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러한 공로로 지난 2023년 통일교육위원 LA협의회 위원 자격으로 대통령이 수여하는 국민포장을 받기도 했다. 가장 권위 있는 수상은 한국전 추모단체 리멤버 727’이 주최하는 제14회 연례 정전기념제에서 비디오 부문 최고상을 수상한 것이다. 최 감독은 ‘625 전쟁 상이용사의 회고라는 제목의 비디오 영상을 제출해 전 세계 100여개국 145명의 심사위원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한편 최감독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젊은이들 못지 않은 강철 체력을 유지하고 있다. 그 비결은 골고루 무엇이든 든든하게 챙겨 먹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평생 한다는 점에서 찾는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평생 할 수 있다는 건 분명 축복이다.

이훈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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