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디케의 시련, 걸림돌과 디딤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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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근 칼럼] 디케의 시련, 걸림돌과 디딤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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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우 근

변호사/ 숙명여대 석좌교수

PEN.KOREA 인권위원장


 자유혼과 민주정신을 물길로 삼아 연면히 이어온 인류역사의 흐름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 기본적 인권의 보장, 권력분립, 국민복지의 향상을 ‘자유민주주의 헌법정신’으로 분명히 제시해준다. 그 헌법정신을 탄생시킨 것은 헌법제정권력인 국민이다. 국민에게서 태어난 헌법정신이 국민 스스로를 구속한다. 헌법제정권력의 자기구속이다. 


대법원 중앙홀의 디케가 슬픔에 잠겨 있다. 디케는 사법의 상징인 정의의 여신이다. 그 디케가 지금 시련을 겪는 중이다. 여당이 대법원장을 상대로 국회 청문회를 열고 범죄혐의자로 수사하겠다고 한다. 대법원장에 대한 사임 압력은 정치권을 넘어 법원 내부로까지 옮겨가고 있다. 


공직선거법은 '선거범 판결 선고는 1심은 공소제기 후 6개월, 2심 및 3심은 전심 선고 후 각 3개월 이내에 반드시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특정 정치인의 공직선거법 위반사건에서 1심은 기소된 지 2년 2개월 만에 유죄판결을, 2심은 항소 후 4개월이 넘은 시점에 무죄판결을, 대법원은 상고 후 1개월여 만에 유죄취지로 파기환송판결을 선고했다. 


1, 2심 모두 늑장 재판으로 법정기간을 지키지 않았고 3심은 선거를 1개월여 앞두고 너무 빨리 판결을 선고한 것이다. 당연히 재판의 정치 관련성이 크게 의심받았다. 디케의 시련은 사법부가 자초한 면이 작지 않다. 그렇지만 턱없이 재판을 지연시킨 1, 2심 재판부에는 아무 탓도 하지 않다가, 재판을 빨리했다는 이유로 대법원장을 물러나라고 닦달할 수 있는가? 판결의 시기가 아니라 판결의 내용을 문제 삼는 것이라면 사법권에 대한 침해행위가 될 수 있다. 


“사법부는 칼도 없고 지갑도 없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한 사람인 알렉산더 해밀턴의 지적이다. 사법부는 행정부처럼 군대나 경찰도 없고, 입법부처럼 예산의결권도 없다는 뜻이다. 국민이 직접 선출한 대통령과 국회의원은 지지층의 충성이라는 정치적 힘에다 칼과 지갑까지 지녔지만, 국민이 선출하지 않은 법관으로 구성된 사법부는 그러한 정치적 배경이 없다. 그럼에도 법관을 국민이 직접 선출하지 않는 이유는 법원이 포퓰리즘에 휩쓸리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다. 법관을 국민이 선거로 직접 선출한다면, 정치적 풍향에 따라 사법이 마냥 흔들리게 될 것이다. 


입법․사법․행정의 국가권력에는 견제와 균형이 있을 뿐, 높고 낮음의 차이가 없다. 사법부가 행정부나 입법부보다 낮은 서열이라면, 사법부의 대통령 파면결정권도, 위헌법률.명령심사권도 허용될 수 없다. 사법부를 지키는 것은 군대도 경찰도, 특정 성향의 지지층도 아니다. 헌법제정권력이자 주권자인 국민의 신뢰만이 사법부를 든든히 지킬 수 있다. 


바닷물의 평균 염분농도는 3.5%에 불과하다. 그 엷은 소금기가 온 바다를 정화하고 무수한 해양생물들을 살아 숨 쉬게 한다. 헌법제정권력인 국민의 신뢰는 특정 정치세력에 대한 지지율이나 현란한 이벤트 따위로 낚아챌 수 없다. 국민에게 감동을 주는 법치는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 그리고 3.5%에 불과한 바다의 소금기 같은 법관들의 투철한 사명의식만이 이끌어낼 수 있다. 


시냇물은 수많은 돌과 바위들에 부딪히면서도 흐름을 멈추지 않는다. 시내의 흐름을 가로막는 돌과 바위들은 시냇물의 걸림돌이 아니라 도리어 디딤돌이 되어 시내의 흐름을 더욱 힘차게, 시냇물 소리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 뿐이다. 그렇듯 어떤 이념도, 어느 권력도 헌법정신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될 수 없다. 이념이나 권력은 모름지기 헌법정신과 평화로운 조화를 이룰 때에만 법치국가의 바른 원리가 될 수 있다. 헌법정신이야말로 역사를 쇄신하고 시대정신을 정화하는 자유민주주의의 뿌리다. 


사법부는 사회적 갈등과 혼돈의 고비마다 법의 정의를 분명하게 선언하고 법의 정신이 시민사회 전반에 뿌리내리도록 전파하는 법치의 바탕자리를 지켜야 하는 중차대한 사명을 떠안고 있다. 마구 소용돌이치는 디케의 시련이 사법부에 걸림돌이 아니라 도리어 디딤돌이 되기를 바란다. 걸림돌을 디딤돌로 삼아 더욱 힘찬 추동력을 얻어 헌법수호의 길을 굳건히 달려가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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