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칼럼] 우리 모두는 영원히 한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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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 칼럼] 우리 모두는 영원히 한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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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선 이사장 (피어리스 76)

 

내가 공군 장교로 근무하던 시절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이념간 이데올로기 속에서 나라간의 갈등이 고조된 냉전시대였다. 쿠반 크라이시스(Cuban Crisis)라고도 하고 휴먼 크라이시스라고도 한다. 흐루시초프와 케네디 간에 팽팽한 긴장감이 있어서 군부대의 분위기가 매우 경직되어 있었다. 1962년 소련이 군함에 미사일을 싣고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설치하러 가는데 미국이 당장 기선을 돌리라고 경고했다. 멈추지 않고 전진하다가 어느 선을 넘으면 그 배를 폭파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초비상 상태였다. 경고를 무시하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다고 위협했다. 미국 전투기 조종사들은 엔진만 걸면 비행기가 뜰 수 있도록 조종석에 앉아 있었다. 미국이 나오니까 결국 소련은 기선을 돌렸다.

지금의 나를 만들어 준 것은 바로 군생활이었다. 당시 공군은 엘리트 중에 엘리트였다. 게다가 오산기지에서 미군들과 함께 복무했고 미국 유학까지 준비하던 터이니 가장 선진적 군문화를 체험한 시기가 바로 그때였다. 군 복무 기간은 4 4개월. 5.16 혁명 후 세상이 바뀌어서 군대에 가지 않은 공무원들이나 요직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쫓겨났다. 그러다 보니 공군장교 시험을 통과했다는 자체가 기적이었다. 200명을 뽑는 시험에 무려 3천 명이 응시한 것이다. 15 1의 경쟁률을 뚫어야 했던 것이다. 장교훈련은 4개월간 대전에서 있었다. 매일의 일정을 마무리 하는 훈련이 훈련장에서 대전 유성 온천장까지 총을 메고 걷거나 뛰는 일이었다. 1-2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는데 몸이 약한 사람들이 쓰러질 때가 많아서 우리 뒤에는 늘 앰뷸런스가 뒤따라오곤 했다. 혹독한 기합도 많이 받았고 차가운 물 웅덩이와 살얼음이 덮여있는 땅바닥을 구르다 보면 군복이 곧바로 꽁꽁 얼었다. 게다가 우리는 늘 배가 고팠다. 장교 출신인 내가 그러했는데 하물며 사병 출신들은 오죽 했겠는가. 국가가 돈이 없으니 단백질 보충은 콩으로 했다. 형무소에서 콩밥을 지급한 이유도 바로 단백질 보충 때문이었다.

소위 임관식을 마치고 2개월간 근무처에 따른 관리장교 기술 훈련을 받았다. 나는 재무 담당 분야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주산(珠算)실력, 부기(簿記)실력, 보고서 작성 등 매뉴얼이 많았다. 군에서 필요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 평가 기간으로 경쟁이 매우 심했다. 나는 오산 공군기지에서 재정담당 관리장교로 월급을 분배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업무실에는 책임자로 중령 한 명과 전반적인 일을 도와주는 사병들이 있었다. 장교는 세계의 신사(紳士). 직급은 소위에 지나지 않지만 국적과 상관 없이 장교의 기본 품격이 있었던 것이다. 이때 에피소드가 있다. 사병이 장교에게 경례하는 것은 국제법이다. 미군이든 한국군이든 이 오산기지의 모든 장교와 사병과 윗사람들이 알고 시행해야 하는 항목이다. 그런데 미국 사병이 한국 장교를 만나면 경례를 붙이는 일이 오산기지에서는 드물었는데 나는 그러한 사병을 보면 장교의 예를 갖춰 나는 장교 리(Lieutenant Lee). 다음에 나를 만나면 반드시 경례를 붙여라. 앞으로 조심해라 너를 지켜 보겠다고 했다. 이후 정복 차림의 미군 사병이 나를 보자마자 우렁찬 인사와 함께 경례를 붙였다. “Lieutenant Lee, I am here to say, I am so sorry that I didn’t salute.(리 장교님께 경례하지 않은 점을 사과 드리러 왔습니다). 이 일이 기사화 되어 미 공군 신문에 실렸다. 미군의 전우애 정신 우리 모두는 영원히 한 가족이라는 말을 증명해 주는 듯 했다. 미국의 국력이 왜 강한지 그 바탕을 알 수 있었다. 호국보훈의 달에 문득 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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