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의 하나됨을 꿈꾸며, 다시 십자가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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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의 하나됨을 꿈꾸며, 다시 십자가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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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작 '부활'(The Resurrection, 1635)


진건호 목사(하톤교회·제55대 남가주교협 회장)

 

지난 2024 11, 남가주기독교교회협의회 제55대 회장으로 임명되었을 때 내 마음에는 오직 단 하나의 기도 제목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뉘어진 교회들을 다시 하나로 묶게 해주십시오. 이번에는, 진심으로 연합하게 하소서.” 그래서 저는 선언처럼 다짐했었습니다. “첫째도 연합, 둘째도 연합, 셋째도 연합”. 그리고 2025년 부활절 연합예배만큼은 모두가 하나가 되어 오랜만에 진정한 연합예배를 드리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이미 몇 갈래로 나뉘어 있었던 남가주의 교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 되어 예배드릴 수 있기를 그것이 내가 품은 가장 큰 기도요 소망이었던 것입니다.

 

#.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편 133:1)

이 말씀처럼, 그 아름다움을 실제로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기꺼이 사람들을 찾아갔습니다. 먼저 손을 내밀고, 귀를 기울이고, 때로는 조심스럽게 서로의 이야기를 들으며, 하나 되는 길을 찾고자 모색 했습니다. 서로 다른 신학, 교단, 전통의 차이조차도 복음 앞에서는 부차적인 일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정은 생각보다 훨씬 더 조심스럽고, 더디고, 복잡했습니다. 대화는 많았지만 마음이 열리기까지는 더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때로는 애쓴 만큼 실망감도 컸습니다. 어떤 때는 함께하겠다는 약속 뒤에 다시 경계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누군가는 저에게 조언처럼 말했지요. “교회 연합은 이상이고, 현실은 다르다오.” 그럼에도 그렇게 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계속 만남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그 말이 뼈에 사무치도록 실감난 것은 바로 2025년 부활절 아침이었습니다.

결국 우리는 함께 예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세 그룹은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장소에서 예배를 드렸고 갑자기 생겨난 또 다른 단체 역시 따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각 미디어에 게재된 광고들은 평신도들을 어지럽게 했습니다. 연합예배가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연합 예배’라는 이름이지만 실상은 네 개의 예배가 각각 드려진 것이죠. 그 순간 내 마음에 무너짐이라는 단어 외엔 다른 말로 설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첫째도 연합, 둘째도 연합, 셋째도 연합하여 예배를 드리게 될 것이라고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믿었습니다. 교회는 무조건 하나여야 하니까. 주님의 몸 된 교회가 하나 되지 않으면,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사역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습니다. 차라리 내가 속한 단체라도 부활절 연합예배를 드리지 않을까도 고민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속한 구성원들 조차도 우리만 예배를 드리지 않을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또한 제가 할 수 있는 방법은 개인자격으로라도 나머지 연합 예배들을 찾아 다니면서 참석하는 것 밖에는 없었지만 그것도 목사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주일이었기에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이야기 하지만 처음 나는 다짐했었습니다. 주님, 부족하지만 제가 이 일을 감당해 보겠습니다. 나누어진 교회들을 하나로 모아 부활절에 함께 예배드릴 수 있도록 이끌어 보겠습니다. 그것이 제게 맡기신 뜻이라 믿었습니다. 그렇게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내 한계인가.’ 그날 새벽 나는 주님 앞에 고개를 숙였다. 연합이 되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를 하는 것도 고려하였습니다.

 

#. 내 의지의 성취는 아니었는가

“스스로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누가복음 14:11) 저는 이 말씀을 다시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제가 하려고 했던 것, 어쩌면 제가 이뤄보려 했던 그 ‘연합’은 진짜 연합이 아니라, 제 의지의 성취였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다시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그제서야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에베소서 4:3) 저는 그저 하나님이 이미 이루어 놓으신 하나 됨을 ‘지켜야 하는 자’였을 뿐입니다. 이루려 한 것이 아니라 지켜야 했던 것입니다. 그 방향의 차이가 결국 제 마음에도 상처를 남겼고 저 자신을 되돌아보게 했습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남긴 평화를 구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이 말이 연합의 본질이라 믿습니다. 제가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아니라, 그분의 도구로 쓰임 받는 사람이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도구이기보다 스스로 연합을 완성하려 애쓴 조각가처럼 살았던 것 같습니다. 돌이켜 보면 이번의 일들은 실패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건 잠시 ‘멈춤’이며, ‘배움’이고, ‘기도의 시작’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 연합은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로

연합은 결코 인간의 열정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무릎 꿇는 것, 겸손히 기다리는 것, 그리고 서로를 향해 손 내미는 일을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어느 위대한 신학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의 일치는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따라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래서 저는 다시 기도합니다. “주님, 제가 연합의 결과를 이루려는 자가 아니라, 연합을 위해 기도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

그리고 저는 부활절 이후 다시 십자가 앞에 섰습니다. 주님의 부활이 제 안의 교만을 무너뜨리고 다시금 연합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하신 그 은혜 앞에 말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리고 다짐해 봅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 이제부터 시작이다.” 그날이 오면, 주님이 친히 교회들을 하나로 세우시는 그날이 오면, 저는 그저 예배당 구석에 앉아 이렇게 고백할 것입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당신이 하셨군요.

 

#. 다시 십자가 앞에

솔직히 말하면 참담했습니다. 그동안 제가 걸어왔던 시간들이 허망하게 느껴졌습니다. 제 능력이 부족했고, 시선이 짧았고, 저의 믿음조차 어쩌면 인간적인 열심에 머물러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지금 다시 십자가 앞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아니, 해야 할 일들을 주님께 묻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응답하시면 지금이라도 그 뜻에 따르고 순종할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27:46) 이 말은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는 뜻입니다. 십자가에 순종하신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이십니다. 이 말씀을 언뜻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버림 받은 것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그날 예수님은 완전히 버림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활이라는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서막이었습니다.

저 역시 이제는 조금씩 받아들이려 합니다. ‘연합’이라는 것은 결코 인간의 열정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셔야만 가능한 일이었는데 그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던 것 같군요. 제가 사람들을 모으고, 다리를 놓고, 설득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하고, 섬기고, 기다리는 것이었을 뿐입니다. 지금이야 말로 오히려 주님이 다시 시작하시려는 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의 노력은 잠시 멈췄지만, 주님의 역사는 멈추지 않으실 테니까. 언젠가 남가주의 모든 교회가 한자리에 모여 주님을 예배하는 그날을 저는 여전히 기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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