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수영의 마음산책] 낯선 자를 초대하는 환대의 마음

홈 > 로컬뉴스 > 로컬뉴스
로컬뉴스

[권수영의 마음산책] 낯선 자를 초대하는 환대의 마음

웹마스터

권수영

연세대 교수 

한국상담진흥협회 이사장


1991년 아프리카계 미국인 로드니 킹이 백인 경찰들에게 심한 구타를 당했으나 그 경찰들이 무죄를 선고받자, 흑인사회의 분노를 유발하면서 소위 LA폭동으로 번졌던 일을 다 기억할 것이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당시 하버드대학교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필자는 한인학생회와 흑인학생회의 연합으로 공동 컨퍼런스를 기획하고 준비위원으로 참석한 적이 있다. 당시 주류 언론은 LA폭동의 원인을 한인과 흑인 사이의 오랜 갈등으로 촉발되었다는 방식으로 문제의 핵심을 오도하곤 했다. 


한인타운은 위치 상 인종 폭동의 피해를 떠안을 완충지대로 이용될 여지를 안고 있었지만, ‘한흑 갈등’이란 것은 결국 허상이라는 점을 대내외에 알리고 싶었다. 당시 컨퍼런스가 언론에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행사를 함께 준비했던 한인 대학원생들과 흑인 대학원생들은 서로를 더욱 깊이 이해하고 상호 존재를 환대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한인학생회의 명절 떡국잔치에 흑인학생들이 초대되었고, 흑인학생회의 문화축제에도 한인학생들이 초대되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2016년 정치 신인이던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필자는 당시 그가 사용했던 유명한 선거구호, MAGA(Make America Great Again)뿐 아니라, 'Make America Proud Again'에 주목했다. 당시 트럼프 후보는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감정인 개인적, 그리고 국가적 자긍심에 금이 가는 일이 발생했다는 점을 정확하게 파악했다.


이민자들, 특히 부지런한 아시아권 이민자들에 비해 현저하게 경제적 수준이 떨어지는 백인들이 생겨났다. 그들의 자긍심은 땅에 떨어졌다. 트럼프 후보는 이민자의 나라에서 상상하기 힘든 정책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이민자들과 불법체류자들에게 강력한 제재를 예고했다. 당시 ‘샤이(shy) 트럼프’라고 불리던 숨은 지지층들은 어쩌면 수백 년간 백인들이 응당 누려온 자긍심이 뿌리부터 심하게 흔들렸던 사람들이었을 지 모른다.


결국, 트럼프는 이민자의 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반(反)이민 정책과 국경폐쇄 정책을 밀어부친 대통령이 되었고, 더욱 강력해진 정책 공약을 앞세워 2025년 화려하게 대통령으로 복귀했다. 이번에도 대선 구호로 채택한 MAGA는 재선 구호에 그치지 않고 미국사회 전반에서 문화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는 분석이 많다. 대학가에 빨간 MAGA 모자를 당당하게 쓰고 다니는 학생들이 생겨나고, 소수인종이나 유학생들을 고려한 다양성 정책이 점차 철회되고 있는 중이다. 이젠 ‘샤이 보수’가 아니라 대놓고 문화를 선도하는 대세가 되었고, 이민자의 나라는 점점 폐쇄적인 국가로 변해갈 운명이다.


필자의 눈에는 2016년 미국인(특히 백인)의 잃어버린 자긍심을 되찾겠다고 선포한 트럼프의 공약은 어느 정도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난 1월 20일 대통령 취임행사의 말미를 장식하는 국가기도회 설교자로 등단한 마리안 버드 미국 성공회 주교의 뼈있는 선포가 가슴을 울렸다. 주교는 전날 국민들에게 자신을 암살시도 가운데 살려주신 신(神)의 섭리의 손길을 느꼈다고 고백했던 트럼프 대통령을 면전에 두고, 같은 신의 이름으로 성소수자, 이민자들과 난민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했다. 


주교는 “우리도 한 때 이땅에 낯선 자(strangers)” 이민자였음을 모두에게 상기시켰다. 이민자의 국가, 미국을 위대한 국가로 만드는 동력은 예비 범죄자를 죄다 몰아내는 일만이 최선은 아니다. 주교의 선포처럼 불법체류자들의 대다수는 범죄자가 아니며, 값싼 노동력으로 들에서 일하고, 사무실 청소를 하면서 미국인들과 함께 사는 이웃이다. 이민자의 나라가 위대한 나라로 성장하게 된 가장 큰 동력은 ‘환대(hospitality)의 정신이다. 


현대 철학자들은 환대란 우리의 마음 안에 낯선 자(stranger)의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이는 우리의 정체성을 주택(house)이라고 비유할 때, 손님을 위한 사랑방 정도는 낯선 자를 위해 비워놓는 태도라고 볼 수 있다. 우리의 마음 안에 낯선 자를 박대하는 태도는 결국 혐오를 낳을 수밖에 없다. 앞으로도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 동력은 혐오나 배타성이 아니라, 환대의 마음이다. 필자는 미주 한인들의 환대정신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