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파낸 동굴 법당과 석불…신에 대한 경외심 대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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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파낸 동굴 법당과 석불…신에 대한 경외심 대단

웹마스터

 ‘호수의 도시’ 우다이푸르의 대표적 관광지인 피촐라호수 안에 있는 자그니와스 궁전의 모습.

아우랑가바드의 유명한 엘로라 석굴의 힌두교 사원과 동굴. 돌산을 통채로 위에서부터 파서 사원을 만들었다.

아우랑가바드의 아잔타 불교 석굴.   

우다이푸르시의 힌두사원. 마침 축제기간이라 신도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뭄바이에서 유명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너’ 촬영지인 빨래터를 둘러봤다

델리에는 이슬람왕들의 묘지인 사원들이 많이 있다. 아름답기로 소문난 이사칸톰을 배경으로 하경철(왼쪽)씨와 포즈를 취했다.

아잔타 석굴의 동굴법당에는 다양한 불상들이 조각돼 있다.

아우랑가바드 계곡의 폭포가 장관이다.

바위 절벽에 29개의 석굴이 모여 있는 아잔타 석굴. 동굴 법당에는 다양한 불상들이 조각돼 있다.

델리 재리시장에 있는 먼지투성이의 길거리 식당. (naan) 빵에 닭고기, 커리면 한끼 식사로 아주 훌륭했다. 가성비도 최고. (사진설명 위에서부터)

[나의 여행기 - 한남체인 하기환 회장 일행 인도 문화탐방] <하>


재래시장서 '짝퉁명품' 싸게 구매

경험 많은 동료 덕에 편안한 여행

선불 택시 이용,바가지 요금 피해

'난' 빵에 닭고기+커리 요리 훌륭

값 싸고 맛도 좋은 인도음식 만족

피촐라 호수 웅장한 궁전들 압권

매연·교통체증 심한 뭄바이 현재 

영화 '슬럼독~' 빈부차 큰 현실

인도 종교 담은 아잔타·엘로라 석굴

여행지에서 확인한 'K-팝' 인기

여행 온 인도 학생들 한국말 인사

세계최대 악샤르담 힌두사원 위용

인도 문화·맛집 탐방 '신의 한 수' 

  


우다이푸르, 호수 안의 자그니와스 궁전

점심을 먹으러 자이푸르에서 맛집으로 유명하다는 현지 ‘반디 식당’을 찾았다. 관광객은 우리밖에 없었다. 현지 주민들은 ‘난’이라는 얇은 빵에 닭고기로 된 커리를 찍어 먹는다. 포크나 수저를 사용하는 대신 오른손으로 아주 깨끗하게 접시를 비운다. 커리가 손에 묻으면 지저분해질 것 같은데 접시를 쓸어가며 잘도 먹는다. 우리 모두도 배부르게 먹었다. 맥주값 포함해서 1인당 10달러 전후이니 역시 가격이 싸다. 우리가 묵는 호텔에서 저녁을 한 끼 했는데 1인당 50달러 넘었었다. 돈은 고사하고 음식이 느끼해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꿀을 넣은 닭고기 커리를 계속 시켰다. 여행 10일이 지나도 전혀 질리지 않았고, 한식 생각도 나지 않았으니 인도 음식이 우리 팀 입에 맞는 것 같았다. 


우리는 다음 여행지인 우다이푸르에 도착했다. 공항에 내려 우선 프리페이드(Prepaid) 택시 창구로 가서 호텔까지 요금을 지불했다. 행선지까지 미리 선불하면 악명높은 택시 바가지를 피할 수 있다. 몇 명이 싸움하듯 들어붙어 흥정할 필요가 없으니 아주 편한 창구였다. 인도 당국도 그런 걸 방지하기 위해, 공항과 기차역에 프리페이드 택시창구를 운영하고 있다. 이번 여행을 준비한 론김 부부는 여행을 많이 한 덕분에 노하우가 많았다. 가성비 좋은 여행을 할 수 있었던 건 론김 부부 덕분이라 할 수 있었다. 공항택시를 타고 호텔로 오면서 택시 기사와 다음 날 관광 예약을 했다. 호텔에서 알선해 주는 전용 택시보다 많이 저렴한 가격이다. 하루 종일 팁 포함해서 50달러가 넘지 않았다. 물론 관광지 입장료와 식사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리고, 또 하나 노하우를 배웠다. 관광 가이드나 호텔 기사들이 추천하는 대부분의 식당은 비싸고 맛도 별로였다. 그러나, 이날처럼 신뢰할 수 있는 기사를 만나면 쇼핑도 현지인이 가는 곳으로 안내한다. 그렇게 좋은 가격과 좋은 물건을 고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 좋은 기사 덕분에 아그라에서 가죽 구두 2개와 슬리퍼 3개를 40불 정도에 산적이 있다. 구두는 영국제 지미추이고 슬리퍼는 독일제 베켄스톡이다. 물론 명품 짝퉁이다. 여행 중 신고 다니는데 발이 편하니 그것으로 만족했다.  


우리는 Lake City 로 알려진 우다이푸르 대표적인 관광지 피촐라 호수를 찾았다 이 호수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고 인공호수이다. 호수 동쪽에 시티팰리스가 있고 호수 속엔 자그니와스 섬과 자그만디르 섬이 있다. 우리가 투숙한 호텔은 호수가 바라보이는 산 위에 지어진 럭셔리 호텔이었다. 이 호텔 옥상에서는 호수의 아름다운 일출과 일몰을 볼 수 있었다. 호수 주변에 지어진 궁전과 호텔들은 스위스에서나 볼 수 있는 멋진 풍경이었다. 우리는 피촐라 호수 안에 지어진 자그니와스궁을 보러 보트를 탔다. 우리가 들린 호수 안의 자그니와스 궁전은 작지만 예쁜 건물이었다. 이 궁전 옆에 2009년도에 왔을 때 투숙한 타지 레이크 호텔이 있다. 당시에도 비쌌었는데 지금은 하루 숙박에 1000달러 정도 된다고 한다. 인도의 물가를 생각하면 엄청난 금액일 것이다. 


호수가에 지은 City Palace 를 찾았다. 16세기에 무굴제국 이슬람의 침략을 피해 메와르왕국이 지었다는 궁전이다. 여기에 벨지움에서 수입한 유리로 벽 천장을 장식했다. City Palace 정원 앞 건물에 관광객 상대로 하는 인도 특산품집을 들렸다. 인도인이 즐겨입는 울(wool)로 된 반코트가 50달러라고 해서 같이 간 동료와 하나씩 샀다. 돌아오는 길에 힌두사원을 들렀다. 힌두 축제일이라 화려한 색깔로 만든 사리를 입고 노래도 부르고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거대도시 뭄바이와 '슬럼독 밀리어네어'

이튿날 새벽에 뭄바이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공항에 내려서 8시간 동안 기사가 딸린 자동차를 렌트했다. 호텔은 나중에 체크인하기로 하고 관광지부터 다닐 생각이었다. 인도 공항 택시 기사들은 영어를 조금씩 하는데, 우리 차 기사는 영어를 전혀 못했다. 소통이 안 되니 답답했다. 뭄바이 게이트 같은 관광지를 돌다 보니 점심 때가 되었다. 예전에 왔을 때 투숙한 뭄바이 바닷가에 있는 타지마할호텔에서 점심을 하기로 했다. 2009년에 이 호텔은 테러리스트들이 폭탄을 터트려 수십 명이 죽기도 한 곳이다. 15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검색은 철저해서 모든 소지품을 검사받고 들어선다. 가격 대비 점심은 맛이 별로인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인도 전통 빵 난(Naan)이 500루피라니 보통 식당보다 4배나 비싸다. 어느 사이 우리 입맛이 인도 서민을 닮아 가는가 보다 하고 서로 보고 웃었다.   


거대도시 뭄바이가 유명해진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Slumdog Millionaire)가 한몫을 한 것도 맞다. 그 영화 촬영 현장이 이제는 관광지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영화에 나온 빨래터와 빈민들이 모여 사는 곳을 찾았다. 도시에서 빨래를 걷어와 세탁하는 빨래터와 붙어서 사는 사람들. 그들의 허름하고 작은 집속을 보니 가슴이 아팠다. 그 좁은 공간은 다리미질하는 작업장인 동시에 거주 공간이기도 했다. 방이 너무 좁아 길게 누워 잘 수도 없을 정도였다. 빈부 차가 극과 극인 인도. 궁전호텔이 있는가 하면 이렇게 힘들게 사는 서민들도 있다. 빨래터 바로 옆엔 개발붐이 불어 50층 이상의 아파트 건설이 한창이었다. 앞으로 빨래터도 없어지고 이곳에도 고층건물이 들어설 것 같다. 


뭄바이는 영국 식민지 때에 상업도시로 번성한 곳이다. 옛날 유적지가 별로 없다. 그 대신 상업지구가 발달되어 있다. 가죽제품이 많아서 서류가방을 25달러 주고 샀다. 인건비가 워낙 싸고 기술자도 많아서 모든 옷을 4시간 정도면 만들어서 배달해 준다고 호객한다. 거대도시답게 뭄바이는 매연과 교통체증이 심해서 호텔로 찾아 들어갔다. 짐을 풀고 현지인에게 물어서 알아 놓은 식당을 찾아갔다.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버터 치킨 미살라 커리를 난과 함께 맛있게 먹었다. 여행 중 만났던 인도 음식은 맛있었고, 우리는 어느새 문화탐방과 함께 맛집 탐방도 하고 있었다. 


10월 16일, 수요일이 되었다. 뭄바이는 영국이 개발한 도시였다. 도시 중심지엔 옛날 영국 식민지 때 지은 고풍스러운 영국식의 건물이 많이 보인다. 거대도시답게 교통체증이 심해서 어딜 가기도 힘들다. 아침에 엘레펀트(Elephant)섬에 가려고 했다가 포기. 섬에서 돌아오는 배편이 오후 5시반 밖에 없기에 비행기편을 못 맞출 것 같아 포기한 것이다. 그 대신 우리는 뭄바이 재래시장을 가보기로 했다. 오래된 시장은 옛날 고색창연한 건물 안에 있었다. 1800년대부터 잡화를 파는 시장이라고 했다. 현지인들이 바글거렸고 잡화와 식료품을 파는 작은 가게들로 차 있다. 길 건너에는 옷감 가게가 있다. 인도인 여성이 즐겨입는 사리 옷감이 가게마다 꽉 차 있었는데 색상이 너무 아름다웠다. 인도의 옷감 제조 실력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그중에 남자 턱시도(Tuxedo) 옷 가게가 있어 들어가 봤다. 미국에서 보기 힘든 턱시도 옷감이 종류별로 있다. 하나 맞추어 보려는데 시간이 맞지 않았다. 여성용 스카프로 캐시미어보다 좋다는 페시미아 몇 개를 선물용으로 샀다. 인도 물가가 많이 싸고 인도의 화폐 루피가 약세니, 가지고 간 미국 달러가 힘을 쓰는 것 같다. 이번도 호텔 현지인이 추천해 준 시내 식당에서 점심 겸 저녁을 먹었다. 인도 식당은 선택을 잘해야 한다. 주인이 이슬람 신도면 절대 술을 안 판다. 뭄바이도 삼복더위처럼 찌는 날씨에 꼭 스팀사우나 들어 온 것처럼 덥다. 그렇기에 식당에서 시원한 맥주 한 잔을 하고 싶은 건 당연한 일. 그러나 식당 주인을 잘못 만나면 술 종류는 아예 말이 안 된다. 메뉴는 맛있는 인도 전통 커리 음식이지만 주인이 무슬림이면 맥주는 마시지도 팔지도 않는다. 


아잔타와 엘로라석굴

우리는 저녁 비행기로 아우랑가바드(Aurangabad)로 떠났다. 유명한 아잔타(Ajanta) 석굴을 보기 위해서다. 아우랑가바드에서 묵고 이튿날 기대했던 아잔타 석굴을 보러 나섰다. 역시 이곳도 도로 사정이 좋지 않고 교통이 막혀 두 시간이 넘게 걸려 도착했다. 불가사의한 아잔타 석굴은 어떤 곳인가. 아잔타는 인도 북서부에 위치 해있다. 바위 절벽에 29개의 석굴이 모인 곳이다. 기원전 1세기경부터 약 1세기 동안 지어진 전기 석굴과, 5세기에서 7세기에 걸쳐 지어진 후기 석굴로 나뉜다. 인도의 풍속이나 불교에 관한 것들이 다채롭게 조각되어 있는 동굴법당. 벽면만이 아니라 기둥, 대들보, 천장 등 광대한 공간의 구석구석에까지 불법이 묘사되어 있다. 8세기 들어 인도가 다시 힌두교로 돌아서며 불교는 쇠퇴한다. 그에 따라 약 1000년 이상 잊혀졌던 아잔타 석굴.


거대한 바위 절벽에 파 놓은 석굴은 모두 29개 있는데, 모든 게 불교 부처님을 위해서 만든 것이다. 기원전부터 줄기차게 동굴을 파내어 법당을 만든 인간의 신에 대한 경외심. 순전히 사람의 손으로만 파낸 동굴. 놀라운 일이다. 어느 석굴은 하나 만드는데 30년이 넘게 걸렸다. 한국의 경주 석굴암보다 더 오래 전에 만들어졌다. 아마 그 당시 불교는 돌산에 동굴을 만들어 부처님을 모시는 게 유행한 것도 같다. 경주 석굴암도 이름대로 석축을 쌓아 올려 동굴처럼 만든 것이니까. 특히 석굴 26번은 사방 벽이 조각으로 채워졌고 부처님이 누운 와상이 한쪽 벽을 크게 장식하고 있었다. 규모도 석굴암보다 훨씬 크고 높다. 석굴은 대부분 부처님이 가운데 크게 자리잡고 벽면과 천장에 부처님 일대기를 벽화로 그려 넣었다. 더운 날씨와 몬순 관계로 그림 채색이 많이 상했지만 지금도 알아볼 수가 있다. 


이튿날은 아잔타 석굴 근처에 있는 또 하나의 유명한 동굴사원을 찾아 나섰다. 엘로라 석굴이 그곳이다. 유네스코 문화유산 목록으로 등재되어 있다. 엘로라 석굴에는 불교만이 아니라 힌두교, 자이나교의 동굴사원이 같이 있다. 불교 석굴은 12곳뿐이다. 시대별로 불교가 석굴을 처음 만들기 시작했다. 뒤를 이어 힌두교가 따르고, 마지막으로 자이나교가 지었다고 한다. 불교 석굴 중 10호가 가장 유명한데 일명 ‘모든 것을 성취한 석굴’로도 불린다. 천장과 회랑이 아름다운 10호 석굴은, 여럿이 모여 함께 예배를 보는 강당이었다고 한다. 


엘로라석굴 중 가장 훌륭한 건축으로 꼽히는 곳은 16호 석굴이다. 이곳을 카일라샤(Kailasha)사원으로 부르는데, 힌두교 파괴의 신 시바를 모신 사원이다. 이곳을 석굴로 부르기는 애매하다. 왜냐하면 바위산을 통째로 위로부터 깎아 아래로 내려가며 만들었기 때문. 높이가 33m, 너비가 54m, 길이가 46m로 시바신의 상징인 링가를 나타내는 탑이 중앙에 있다. 힌두교인들이 모시는 링가는 다산과 함께 남성 성기를 뜻한다. 힌두교 동굴 끝에는 불교 동굴과 달리 아무 것도 없다. 불교는 항상 석가모니 상이 정중앙에 있었다. 힌두교 동굴은 무언가 있는 걸 옮겼는지, 신 종류가 너무 많아 하나를 지정할 수가 없어 그런지 모르겠다. 보통 시바라는 힌두신이 최고의 신으로 추앙받는데 시바가 여자인지, 남자 신인지도 나는 잘 모르겠다. 


자이나교 동굴은 처음 들어보는 종교 법당이었다. 자이나 교도들이 판 동굴 속을 보면 부처님을 모시는 것도 같았다. 중앙에 부처님을 닮은 상이 있고 코끼리 조각상도 보인다. 궁금하여 나중에 알아봤는데, 부처님과 동시대에 만들어진 고대 종교가 자이나교였다. 자이나교 석굴에서 내가 본 석상은 교주 ‘마하비라’였던 것이다. 무소유 정신을 가르치는 자이나교. 불교는 세계화에 성공했으나 자이나교는 지금 인도에만 존재한다. 그리고 인도의 재벌인 타타그룹 회장처럼 경제인 상당수가 자이나교도들이다. 


마침 수학여행을 온 듯한 학생들이 우리를 보더니 한국말로 인사를 건낸다. K-POP 효과가 정말 대단한 것을 느꼈다. 인도를 여행하다 느끼는 점은, 인도인들은 외국인에게 호기심이 많다는 것이다. 어디에서 왔는지 말을 걸고 알고 싶어한다. 사진을 같이 찍자며 친절하게 다가선다. 힘들게 발품을 팔았던 석굴 유적 탐방도 끝났다. 이곳도 역시 여전히 습하고 덥기는 마찬가지다. 이 더위에 그 많은 동굴을 걸어 둘러보기도 쉽진 않았다. 분명히 만 걸음 이상 걸은 건 분명했다. 종교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눈으로 확인한 날이었다. 


최대의 악샤르담(Akshardham) 힌두교 사원

우리는 석굴 탐방을 끝내고 저녁 비행기로 델리로 향했다. 도착한 델리 시내는 역시 더웠고 스모그가 많았다. 우리는 이튿날 힌두교의 성지로 불리는 악샤르담(Akshardham)이란 템플을 찾았다. 그동안 엄청난 종교 유적지들을 둘러보았기에 별로 기대를 하지 않고 찾아갔던 것. 그런데 인파와 건물 크기와 정교한 조각 작품에 정말 놀랐다. 이 사원은 2005년 완공되었는데 세계 최대 크기의 힌두교 사원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축구장 16배 크기의 악샤르담은 현대판 앙코르와트(Angkor Wat)로 불릴만했다. 악샤르담 건설에는 타지마할처럼 5년간 무려 1만5000명의 건축·공예 전문가들이 투입되었다고 한다. 


높이 43m에 세워진 장대한 돔과 본당을 중심으로 새겨진 화려한 조각상. 그리고 분홍빛 건물이 예술 조각처럼 보이는데 시큐리티가 철저해서 전화기도 못 가지고 들어간다. 그래서 사진도 못 찍었다. 철저한 검색으로 줄지어 입장하는 데만 30분 이상이 걸린다. 인도 어디에 가나 관광지 입장료는 두 종류다. 자국인과 외국인. 외국인은 현지인보다 5배에서 15배까지 비싸게 받는다. 예전의 중국 관광에도 현지인과 외국인을 차별했는데, 인도처럼 15배까진 아니었다. 현지 인도인들의 소득을 감안하여 만든 정책이겠지만 무언가 부조리한 느낌이 든다. 


요금 차별화에 기분은 별로지만 우리가 찾은 악샤르담의 규모는 정말 대단했다. 로마에 있는 가톨릭 바티칸성당, 사우디에 있는 이슬람의 모스크와 비교되는 힌두사원.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최고의 섬세한 조각으로 사원 전체를 장식하고 있다는 것. 대강당 중앙에는 불교 사찰에서 볼 수 있는 부처님 대신 거대한 시바신 동상이 자리 잡고 있다. 사원에 입장하는 사람들 복장도 까다롭다. 당연히 신발은 벗어야 하고 무릎이 안 보이게 바지를 입어야 하는 등 제약이 많다. 그러고도 사진도 못 찍는 등 아주 까다로운 것이 관광객들에겐 불만이겠다.


시간이 남아 이슬람 왕이 거주한 레드포트(Red Fort)를 찾아갔다. 내 기억으로는 아그라 궁보다 규모도 크고 성곽 높이도 상당한 성이었다. 그런데 그동안 관리가 전혀 안 되어서 온통 쓰레기 밭으로 변해 버렸다. 예전에는 깨끗하고 인상적인 궁전이었는데 폐허처럼 되어서 실망했다. 우리는 델리에서 가장 크다는 모스크 앞에 재래시장을 들렸다. 오토바이 소음과 매연과 사람으로 꽉 찬 시장바닥. 신분이 낮은 계급의 노동자는 길바닥에 접시를 놓고 손으로 음식을 먹고 있다. 여기도 주로 이슬람인들이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다. 식당 앞에서 닭고기를 굽고 난 빵을 화덕 벽에 붙여 구워 내는 재래식 시장의 식당. 우리는 그중에서 깨끗해 보이는 식당에 들어섰다. 그건 용기가 필요한 부분이었다. 왜냐하면 미국에서 출발할 때 들었던 충고. 인도여행에서는 물은 꼭 병물을 마시고 음식은 호텔식당을 찾아라. 아마 배탈 때문에 그런 조언을 해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인파가 붐비는 재래시장, 그것도 먼지투성이 길가 식당을 찾은 것이다. 이슬람 주인이라 식당에 맥주가 없는 걸 알았다. 닭고기 고치와 난 빵을 주문해서 4명이 배부르게 점심을 먹었다. 음식은 정말 맛있었다. 계산을 하려니 10달러가 채 안 되었다. 정말 싸도 너무 쌌다. 이런 가격인데도 맛도 좋았고 배탈도 나지 않았다. 과연 가성비 최고의 식당이었다. 


드디어 10월 20일, 한국으로 떠나는 일요일을 맞았다. 한국행 비행기가 오후 늦게 떠나서 관광 중독자처럼 유적탐방에 나섰다. 델리에는 대제국을 건설했던 무슬림 왕들 무덤, 소위 왕릉이 많았다. 따지고 보면 이번 인도여행에서 무덤과 종교와 왕들의 거처만 둘러본 것 같다. 지금이나 예전이나 사후에 대한 걱정이 많았던 건 사실이다. 인도여행에서 하나 느낀 게 있는데 종교에 따라 왕들 무덤이 다르다는 점이다. 인도에서 무슬림 왕들은 죽으면 큰 무덤을 만들어 그곳에 안치되었다. 타지마할처럼. 그런데 인도에서 힌두교 왕의 무덤은 볼 수 없다. 힌두교 교리대로 왕이나 서민이나 모두 화장을 했으니까. 이것도 이번 여행에서 발품을 팔아가며 배운 공부 중 하나였다.


오후 늦게 한국 비행기를 타고 21일 새벽에 인천에 내렸다. 처음에는 에베레스트를 가기 위해 출발했는데 인도 문화탐방만 하고 돌아온 것이다. 그래도 후회는 없다. 어쩌면 네팔의 홍수 때문에 인도 체류를 늘린 것이 신의 한 수였다는 생각도 들었다. 여행도 체력이 있어야 한다. 미국에서 스키로 다져진 체력과 팀워크로 여행은 늘 즐거웠고 보람찼다. 이렇게 우리 팀의 3주에 가까운 인도여행은 무사히 끝났다. 서울에 도착한 첫인상. 역시 서울은 깨끗하고 질서가 있고 안전한 나라였다. 인도와 비교한다면 정말 하늘과 땅 차이. 대한민국이 천국 같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이 글을 맵씨있게 손을 봐 준  스키협회 회원인 테미 김 작가에게 감사를 전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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