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근 칼럼] 잔잔한 아드리아, 격랑의 발칸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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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근 칼럼] 잔잔한 아드리아, 격랑의 발칸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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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우 근 

변호사 / 숙명여대 석좌교수

 

동화 속 마을인가? 환상적일 만큼 정겨운 풍경이 깊이 잠들어 있던 동심을 일깨웠다. 슬로베니아 수도 류블랴나의 아늑하고 깔끔한 모습에 문득 빠져든 착각이다. 알프스 빙하가 녹아내린 블레드의 호수와 섬도 현실 속의 공간이 아닌 듯 이채로웠다. 이처럼 아름다운 나라의 자살률이 높다니… 이해하기 힘든 모순이다. 파올로 코엘료의 소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에서 주인공이 자살을 결심한 것은 우연이 아니겠다. 그녀는 모순을 품은 슬로베니아의 여성이었다. 


호수처럼 잔잔한 아드리아 바닷가의 몬테네그로는 로마제국 오스만 세르비아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잇달아 받아오다가 2006년 유고연방에서 독립을 이룬 작은 나라다. 지배와 저항으로 얼룩진 격동의 역사가 우리와 닮아서인지, 아름다운 성곽도시 코토르 거리의 정경이 내내 잊히지 않는다. 


나이아가라가 웅장하다면, 크로아티아의 플리트비체는 경이롭다. 크고 작은 폭포와 신비한 빛깔의 호수들, 78m 높이의 벨리키 폭포수, 아기자기한 나무다리 아래 나지막이 흐르는 맑고 투명한 냇물은 ‘에덴동산이 이런 모습 아니었을까’하는 엉뚱한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아드리아의 진주’라는 두브로브니크는 외적의 침입을 물리쳤다는 수호성인 성 블라이세 성당과 기사 올란도의 기둥, 렉터 궁전, 나폴레옹 점령군이 세운 스르지 산의 흰 십자가 등 역사의 격랑을 간직한 유적들이 그득하다. “지상의 천국을 보고 싶다면 두브로브니크로 가라.”고 했다는 조지 버나드 쇼의 말 때문일까, 두브로브니크는 TV드라마 ‘왕좌의 게임’의 촬영지가 되었다. 


유럽 최초로 노예제도를 폐지한 도시국가 두브로브니크에는 왕이 없었고, 1년 임기의 명예직 통치자인 렉터가 가족과의 동거가 금지된 독방에서 국정을 이끌었다고 한다. 렉터의 아내가 뇌물을 받더라도 남편에게 전달하거나 청탁할 길이 막혔으니, 권력의 부패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던 셈이다. 600년 전 옛사람의 절제가 아쉬운 오늘의 현실이 씁쓸하다. 


아드리아해 연안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스플리트에는 스스로 퇴위한 로마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여생을 즐기려고 호화롭게 건축한 옛 궁전이 남아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병졸을 시작으로 하급 장교를 지낸 뒤 황궁의 경호대장을 거쳐 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야만족의 위협에 시달리던 격동의 시대에 그는 2정제(正帝) 2부제(副帝)의 사두(四頭)정치체제를 이끌며 뛰어난 정치력으로 내외의 혼란을 잠재웠다. 


사두체제의 선임 황제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그리스도교를 혹독히 탄압했다. 신(神)을 자칭한 그는 성당들을 철거하고 사제와 주교들을 체포하거나 처형하는 한편, 교회 소유 재산을 모두 몰수했다. 당시 로마의 관료와 군인 중에도 그리스도교 신자가 적지 않았는데, 이들을 모두 면직하자 큰 저항이 일어났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군대를 보내 가혹하게 진압했다. 그의 그리스도교 박해는 무려 3천5백여 명의 순교자를 낳을 만큼 역사에 큰 격랑을 일으켰다. 


그렇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그리스도교 탄압은 후임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곧바로 뒤집히는 헛수고가 되었다. 자진 은퇴한 유일한 로마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평안한 여생을 누리고 싶어 했지만, 동서 로마의 정제와 부제들의 권력다툼에 아내와 외동딸까지 목숨을 잃게 되자 상심한 나머지 자살했다는 풍문이 전해진다. 호화로운 궁전에서 안락하기를 바랐던 그의 여생은 전혀 안락하지 않았다. 스플리트 궁전은 격동의 시대를 거치면서 모순의 궁궐이 되었다. 


발칸반도 중앙에 남북으로 길게 뻗은 잿빛 돌산 너머에는 인종청소로 악명 높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아직도 내전 후유증의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다. 반대쪽 아드리아 바닷가에는 라벤더 향 그윽한 흐바르 섬의 꿈결 같은 평화로움이, 아스라이 번져가는 로비니 항구의 저녁놀이 눈부시도록 황홀하건만…. 


발칸반도는 온통 모순의 땅이다. 잔잔한 아드리아해와 격랑의 발칸반도를 떠나 남북의 명암이 뚜렷이 엇갈리는 또 다른 모순의 땅 한반도로, 권력싸움 살벌한 그 남쪽으로 무거운 발길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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