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수영의 마음산책] 외상 후 성장, 또 다른 ‘한강의 기적’
권수영
연세대 교수
한국상담진흥협회 이사장
1992년 미국 유학을 떠났을 때, 나는 88서울올림픽 덕을 참 많이 보았다. 자기 소개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는 몇 년 전 하계올림픽이 열린 도시에서 왔노라고 힘주어 말하곤 했다. 내 답변을 들은 미국인들의 반응은 한결 같았다. 모진 전쟁의 폐해를 단기간에 극복하고, 놀랄만한 산업화를 이룬 ‘한강의 기적’의 나라에서 왔다면서 나까지 추겨 세웠다.
하지만, 미국이 칭송한 ‘한강의 기적’이란 소련이 무너진 후에 유일한 수퍼파워로 군림해온 미국표 ‘승리주의’(triumphalism)의 또 다른 상징이었다. 미국이 구해준 대한민국은 어느새 산업화, 민주화를 넘어 트럼프 당선자가 대선 유세 중 ‘돈 찍어내는 기계(money machine)’라고 부를 정도로 부강한 국가 반열에 오르는 최상급 기적을 연출하기에 이르렀다.
서방이 언급하는 이런 ‘한강의 기적’은 그저 축하할 일이기만 할까?
돌이켜 보면 세계에 존재감을 알리기 시작한 88서울올림픽부터 이미 한강의 기적 배후에 어두운 이면이 존재했다. 당시 대학에서 사회학과목을 수강 중이었던 나는 한 사회학 교수의 푸념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교수님은 당시 올림픽을 위해 외관을 정비하는 데 들어간 공식 경비가 2조4000억원이며, 사회간접시설까지 하면 12조원이라고 강조하셨다. 하지만, 평화와 화합이라는 올림픽 정신은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며 열을 내셨다. 대규모 경기장, 고급 선수촌아파트, 쇼핑센터와 레저타운이 생겨나는 올림픽 준비 이면에 수많은 노점상들의 생존권이 박탈되고 삶의 자리에서 내몰리는 수많은 철거민들이 발생하는 아픔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겉은 ‘올림-픽’처럼 보이지만, 속은 ‘내림-픽’이라고 강하게 비판하셨던 장면이 잊혀지지 않는다.
서방이 추켜세우는 ‘한강의 기적’은 어쩌면 동전의 한 면만 보고 승리를 자축하는 외통수일 수밖에 없다. 겉은 산업화이고, 민주화의 상징처럼 보일 수 있다. 허나 대한민국의 속살은 피 멍든 생채기가 있고, 힘이 없어 내몰려 말 못하는 일부 국민들의 마음에는 엄청난 트라우마가 숨어 있었다. 다행히 이런 ‘한강의 기적’ 이면의 진실을 알리는 문화 예술인들이 생겼다.
영화 ‘기생충,’ 드라마 ‘오징어 게임’은 한강의 기적을 이룬 나라가 가진 숨겨진 아픔을 전 세계에 용기 있게 드러내기에 충분했다. ‘한강의 기적’이란 포장지를 살짝 걷어내자, 처절한 가난과 차별의 속살이 드러났다.
지난 달 온 국민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한국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은 또 다른 ‘한강의 기적’을 맛보도록 했다. 한강 작가가 이룬 또 다른 기적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그녀의 책을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하면서, 스웨덴 한림원은 “한강 작품은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선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고 수상 이유를 밝혔다.
한국사의 숨겨진 국가폭력과 집단적 트라우마가 오히려 전 세계의 이목을 사로잡은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에서 보는 한국인의 모습은 늘 강인하고, 꿋꿋하고, 전쟁을 반 백 년 만에 거뜬히 이겨낸 전사여야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트라우마를 가슴 깊이 묻고 살아가는 한국인의 모습은 그보다 훨씬 애절하고 애달프다. 한강 작가의 작품은 5.18과 같은 국가폭력을 고발하는 형식의 저항문학과는 다르다. 한 평론가는 그녀의 책을 읽다 보면 고통을 그저 ‘읽는’ 것이 아니라, 문장에 ‘찔리고’ 있는 느낌을 받게 된다고 고백한다. 독자를 트라우마 고통의 진실로 빠져들게 만드는 그녀만의 마술이었다.
현대 심리치료에서 마음속 트라우마를 적절하게 치유하는 방법은 과거의 기억을 망각하거나, 통각을 무디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을 늘 승리의 나팔수로 살아야 한다고 믿는 순간, 트라우마는 전혀 다룰 수 없게 된다. 심리치료 전문가들은 더 이상 트라우마를 장애로만 여겨 제거하려고 들지 않는다. 대신 트라우마 고통을 용기 있게 감각적으로 마주할 때 서서히 성장하는 ‘외상후 성장’(post-traumatic growth)이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한강의 기적’은 우리 한민족 고유의 아픔과 역사적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마침내 성장하는 모습을 온 세상에 보여주는 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