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우 근 

변호사 / 숙명여대 석좌교수

우리말은 세상의 어떤 언어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풍부한 어휘를 자랑한다. 파생어의 확장력도 뛰어나,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를 놀랍도록 세밀하게 짚어낸다. ‘발그레한 뺨’ ‘새빨간 거짓말’은 익숙한 말이지만 ‘발그레한 해’ ‘새빨간 이야기’는 생뚱맞다. 우리는 시(時)를 하나·둘·셋…의 우리말로, 분초(分秒)를 일·이·삼…의 한자어로 말한다. ‘세시 삼분 삼초’라고 말하지 ‘세시 세분 세초’나 ‘삼시 삼분 삼초’라고 하지 않는다. 

가족(family)이라는 말도 상황에 따라 다르게 쓰인다. ‘가정법원’(family court)이지 ‘가족법원’이 아니다. 여성들은 남편을 ‘아빠’ 남자친구를 ‘오빠’라고 한다. 처음 만난 노인도 할아버지 할머니로, 낯선 사람도 아저씨 아주머니로 스스럼없이 부른다. 세상 모든 사람이 3촌 이내인 셈이다. 우리의 혈통친화적 언어습관을 외국인들이 이해하기는 쉽지 않을 터이다. 

국민(people)이라는 말도 쓰임새가 다양하다. ‘국민 배우’도 있고 ‘국민 라면’도 등장했다. 정치이념에 따라 국민의 의미도 다르다. 우리 국민은 나라의 주권자이지만, 독재국가의 민중은 왕조시대의 신민(臣民)이나 다름없다. 식민지의 민족은 억압과 저항의 민초, 군주국가의 무산대중은 힘없는 백성일 뿐이다. 국민을 계급투쟁의 돌격대쯤으로 여기는 마르크시스트, 선동과 정치공작의 대상으로밖에 여기지 않는 포퓰리스트들이 국민이라는 말을 분별없이 쓰고 있다. 

국민이라는 단어 하나에 인민·백성·민족·민초·민중 등 수많은 의미가 담겨있다. 정치인들마다 ‘국민을 섬긴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지만, 그네들이 말하는 국민은 결코 같은 국민이 아니다. 한쪽에서는 국민의 이름으로 찬성하고, 다른 쪽에서는 국민의 이름으로 결사 반대한다. 우리말의 정확한 표현력도 정치판에서는 도통 힘을 쓰지 못한다. 

“나는 노예가 되고 싶지 않은 것처럼 주인도 되고 싶지 않다. 이것이 민주주의에 대한 나의 생각이다.” 링컨의 이 명언에는 국민이라는 말이 한마디도 들어있지 않지만, 국민주권과 민주주의의 신념을 선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풍부한 어휘, 뛰어난 표현력을 지닌 우리말을 가지고도 그저 사나운 막말·욕설·선동밖에 뱉어내지 못하는 우리 정치꾼들에게는 도무지 기대하지 못할 신념이겠다. 

성격심리학은 인간관계를 그르치는 어두운 성향의 인격을 ‘어둠의 3요소’로 제시한다. 목적을 위해서는 어떤 수단도 정당화하는 마키아벨리스트, 자아도취에 빠져있는 오만한 나르시시스트, 공감 능력이 없고 반사회적 공격성이 강한 사이코패스… 이런 어두운 성향의 인간들은 세상만사가 모두 자기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는다. 

분별력 없고 생각 짧은 국민이 스스로를 권력의 시중꾼으로 무릎 꿇린다. 독일 국민의 선거로 총통이 된 히틀러는 독일 국민의 이름으로 나치만행을 저질렀고, 중국 국민의 선거로 권력을 잡은 극단주의 세력의 부추김을 받은 홍위병들은 중국 인민의 이름으로 문화혁명이라는 반문화적 광란극을 벌였다. ‘국민’의 말뜻이 더럽혀진 것은 바로 선거권을 가진 국민 때문이었다. 미국 평론가 조지 네이선은 “나쁜 공직자는 ‘투표하지 않는, 좋은 시민’에 의해 선출된다”고 꼬집었지만, 놓친 것이 하나 있다. 어두운 성향의 사악한 권력자들은 ‘투표하는, 생각 짧은 국민’에 의해 선출된다는 사실이다. 

마키아벨리스트‧나르시시스트‧사이코패스, 그 어둠의 세력을 정치판에서 몰아내는 일은 생각 깊고 분별력 있는 국민의 몫이다. 대통령선거를 눈앞에 둔 미국 국민의 생각, 여야의 막장 싸움에 시달리는 한국 국민의 분별력이 역사의 시험대 올라 있다. 

“인간이 간절히 바라야 할 유일한 권력은 결국 스스로에게 행사하는 권력이다.” 아우슈비츠에서 나치의 악행을 몸소 겪고 살아나온 엘리 위젤의 통찰이다. 국민이 스스로에게 행사하는 권력은 다름 아닌 주권이다. 그렇다면, 생각 깊고 분별력 있게 행사하는 주권이야말로 국민이 간절히 바라야 할 유일한 권력일 것이다. ‘국민’이라는 우리말의 참뜻을 올바르게 지키는 것은 정치인들이 아니다. 국민 자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