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번이라도 좋다, 이 끔찍한 생이여… 다시 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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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이라도 좋다, 이 끔찍한 생이여… 다시 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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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너리즘 극복하고 비상하는 배우 조창현


고교 '연극반'·동국대 연영화과서 다진 실력 

기획사와 계약할 만큼 주목받고도 성공 못해

미국서 군복무 후 뮤지컬 '도산' 출연 계기로 

미국배우들과 연극하며 배우 자신감 되찾아



소년 조창현은 어린시절부터 배우를 꿈꿨다. 아파트 창가에서 인형을 보여주며 연극하기를 즐기던 소년은 청소년이 되면서 예술고등학교를 가고 싶었다. 그러나 동생이 백혈병에 걸리면서 결국 ‘아이스하키(체육특기생)를 할 수 있는 동북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그러나 질풍노도의 시기, 매일 이어지는 구타와 체벌은 배우를 꿈꾸던 그에게 너무나도 가혹하여 포기를 하게 되는데 이때 눈에 들어 온 것이 바로 ‘연극반’이었다. 마침내 ‘죽은 시인의 사회’로 청소년연극제를 통해 학전블루소극장 무대에 서게 된 그는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을 찾게 되었고 연극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동국대학교 청소년연극제에서 수상한 이후 자연스럽게 연극영화과에 진학하게 된다.


◇위선자 '따르뛰르'

조창현이 입학했던 시기는 동국대 연극영화과가 역대로 화려했던 때다. 조여정이 선배였고 동기로는 전지현, 한채영, 소유진에 후배로는 조인성, 신민아, 전혜빈이었으니 주눅이 들 법도 한데 그는 쫄지 않았다. 게다가 하나의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데 당시 ‘엽기적인 그녀’로 톱스타였던 동기 전지현 때문이었다. 2학년 1학기 ‘중급연기’ 핵심 발표 때 전지현이 먼저 상대역으로 조창현을 지목한 것이다. 


작품은 몰리에르의 ‘위선자 따르뛰르’. 교묘한 화술의 소유자인 따르뛰르 역은 결코 쉬운 배역이 아니었다. 비록 사전연습을 펑크내기는 했지만 당일 일찍 만나 호흡을 맞춘 후 무대에 올려 호평을 받게 된다. 연출자들은 ‘동국대 연극영화과에 남자 배우의 맥이 끊겼는데 잘 됐다’며 반겼다. 전지현과의 인연으로 당시 톱스타였고 선배였던 이정재를 만나기도 했는데 그의 아우라에 처음으로 주눅이 들었다고 했다.


이후 ‘백골부대’에서 시작한 군생활은 처음 소총수로 시작해 조교로 화려하게 마무리 되었다. 그의 말을 빌자면 지드래곤, 천정명 등 스타가 되려면 ‘조교’ 생활을 해봐야 한단다. 복학 이후 그는 탄탄대로를 달렸다. 지난 2008년 ‘이해랑 예술극장’ 개관을 기념해 동국대 동문합동공연으로 '햄릿'을 올리게 되는데 이윤택 연출에 ‘재학생 햄릿’은 그가, ‘졸업생 햄릿’은 이정재가 맡았다. 한국 사실주의 연극의 효시로 불리는 고(故) 이해랑 선생이 1951년 한국 최초로 연출해 화제를 모은 작품이자, 1989년 생애 마지막으로 연출한 유작이기도 한 햄릿에서 그는 생애 최고의 연기력을 보여 주었다. 배우 이정재가 영화에서 매너리즘에 빠졌다가 ‘연기를 너무 힘으로만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고 새롭게 다시 시작했다는 바로 그 공연. 조창현은 주목을 받으면서 영화 ‘주먹이 운다’를 제작하며 떠오른 신생 ‘브라보 엔터테인먼트’에 5년 계약으로 소속된다.


그러나…

탄탄대로일 것 같았던 배우 조창현은 성공하지 못했다. 영화 ‘그림자 살인’ ‘방자전’을 비롯하여 연극 ‘다리퐁 모단걸’에 출연한 것은 물론 꿈에 그리던 국립극단 무대에서 오태석 연출 ‘태’를 통해 장민호, 오영수 선생 등등 쟁쟁한 배우들과 무대에 섰던 그는 배우로서는 도무지 집안 형편을 일으켜 세울 자신이 없어 도미(渡美)를 결심하고 우선 신분문제를 해결하고 영어실력을 늘려야겠다는 생각에 미군에 복무하게 된다. 


전역 이후 본격적인 이민생활을 하게 되면서 연기자의 삶과 멀어져 가던 그에게 어느 날 ‘고난’이 찾아왔다. 팬데믹을 겪으면서 빚더미에 앉게 되고 이혼을 경험하게 되면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되면서 돌고돌아 다시 무대로 돌아온 것이다. 


다시 연기를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도 잠시, 뮤지컬 ‘도산’을 필두로 미국 배우들과 함께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 ‘로미오와 줄리엣’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청년 예수’ ‘리어왕’ 등에 잇따라 출연하게 되면서 ‘나는 배우다!’라는 자신감이 다시 생기게 되었다. 


인생의 시련들은 마침내 그를 연기에 눈 뜨게 했고 한국에서처럼 탄탄대로였다면 오늘이 있었을까 싶을 만큼 디테일 한 감정의 연기가 가능해졌다. 이제서야 배우가 얼마나 의미있는 삶인지를 깨닫게 되었다는 배우 조창현. 작은 배역도 마다하지 않는 그는 날마다 니체의 “몇 번이라도 좋다, 이 끔찍한 생이여…, 다시 한 번!(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인용)을 외치며 오늘도 무대에 서고 있다. 


이훈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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