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영수의 코디미 40년 연예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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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영수의 코디미 40년 연예비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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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남의 까여도 버텨라


1981년 개그프로 청춘만세에서 다른 이유도 있었겠지만 이삿짐 나르지 않았다고 잘렸다면 세상에 별일일것이다. 그러나 그땐 그랬다.


경쟁자가 하나씩 제거될 때마다 불안감에 시달렸을 동료들이 걱정됐다. 어차피 대중과의 승부세계인데 개인에게 잘 보여서 편하게 가는 것이 국민을 웃기는데 무슨 도움이 되겠나. 죽을 죄를 졌습니다. 한번만 은혜를 베풀어 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선처해 주십시오. 사과나 해명, 반성할 틈도 주지 않고 내쳤다. 사고는 났다. 수습이 문제다.


연기자 파리목숨이란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 쉽게 빨리 허무하게 예고없이 쫓겨날 줄이야….

배역에서 제외됐다는 말은 고급스럽다. 우리들 보통하는 말로는 까였다고 한다. 정확한 용어로는 도중하차했다.


사실을 말하면 개그맨은 개인기를 기르는 게 훨씬 더 빠른 길이다. 경쟁에서 살아 남아야 하기 때문에 일하던 곳을 조용히 떠났다. 당사자가 억울함을 토로하고 저항하면 그건 다혈질로 낙인 찍힌다. 구제불능이 되는 것이다. 


이바닥에선 이런 경우 연기자 편에 서면 동시패션으로 가는 거다. 연예계 방송계 그많은 사람중 구제와 위로를 위해 누구하나도 나설수 없도록 훈련이 잘 돼 있는 집단이다. 스스로를 알아서 기는거다. 남은 자들은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다. 힘 없고 결정적으로 기획사가 없는 사람들이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갑질 없는 동네가 있겠나?


권력은 쓰지 않으면 칼인 줄 모른다. 그러니까 있을 때 마구 휘두를 수밖에. 잘 나가던 문화예술인이 하루아침에 아니 오후 4시반 쯤에, 오밤 중에, 초저녁이면 어떤가 점심에도 괜찮다. 그냥 아무 때나 이유 없이 사라지는 일을 우리는 수시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다들 쉽게 이야기 해버린다. 실력이 없어서, 인간성이 나빠서, 돈을 너무 밝혀서, 남녀 간 이성관계가 복잡해서 떠난 거라고….


방송국 문은 언제나 열려 있지만 떠나면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위기가 왔다. 불과 1년 방송을 했고 아직 이름도 제대로 올리지 못했는데….


그 무렵에 최고의 전설적인 DJ 이종환 선생님과 '달려라 팔도강산'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하고 있었는데 그 프로에 쓸려고 리포터 자격으로 뮤지컬 에비타를 연습 중인 조영남 형님을 찾아갔다. 홀리데인 서울극장 야간무대에 출연 중이었는데 옆 삼겹살집에서 생애 처음으로 나의 우상을 만났다. 약간 이상으로 흥분상태였다. 미국에서 신학대학을 마치고 귀국해 뮤지컬을 한다니 장안의 화제였다. 그래서 이종환 DJ가 리포터를 급파했고 인터뷰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녹음 후 형님·동생 인연을 맺은 기념으로 내게 금쪽같은 삶의 지침을 소주 한 잔에 안주를 곁들여 주었다. “인생은 버티는 것이다.” "버텨야 살아남는다." 대선배의 명언이다.


일년이면 수백 명의 탤런트, 가수, 코미디언이 쏟아져 나온다 뽑으니까 뽑히는 것이다. 뽑힌 것은 시작일 뿐 버티는 자가 승리하는 것이다. 죽을 때까지 끝날 때까지 버텨라! 멘토의 말씀대로 일터를 떠나 악착같이 죽을 각오를 하고 버텼다.


식음전폐 두문불출 투쟁이 시작된 건 다른 것은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렇게 버티기를 3일쯤하고 있을 때 KBS개그맨 실장 김형곤이 찾아왔다. 영수형! 큰 데 가서 놀자. 김 부장님이(유머1번지 PD) 꼭, 데려오래! 우린 방송망이 넓고 일이 많잖아. 가자구!


의외였다. 너무 놀랐다. 김형곤을 몇 번 만난 적은 있었지만 친하지는 않았다. 데뷔하자마자 장두석과 더불어 '쑈! 젊음의 행진'에서 돌찌개로 인기스타가 되었고, '유머 1번지' 간판으로 KBS를 대표하는 연기자가 되었는데 특별한 재주를 보인 적도 없고 영입할 만큼 인기가 있는 것도 아닌 나를 위해 심부름을 다닐 군번은 아니었다. 혹시 나를 과대평가 했던 것은 아닐까.


유머 1번지에서 청춘만세를 관찰하고 있다가 내가 방송에서 사라지자 사건이 생긴 것을 알고 신속히 스카우트 제의를 해온 것이다. 기적같은 일이다. 


다음주부터 바로 유머 1번지에 출연했고 거기서 심형래를 만났고, 명랑극장을 같이 했고 하룡서당 코너로 대박이 났다. 임하룡, 심형래는 스타가 됐고 나는 거기 붙어 있었기 때문에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유명세도 붙었고 돈도 벌었다. CF도 찍고 밤무대도 뛰게 됐다. 해외공연도 가고 내친김에 심형래와 영화 우뢰매를 그리고 속편까지 찍었다. 자그마치 6편이나 나왔다. 이건 영화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홍콩 할매귀신은 또 어땠나. 주가가 뛰고 하는 것마다 대히트가 되어 그야말로 전성기를 맞았다. 인생이 뒤바껴 버렸다. 어제의 엄영수가 아니다. 


만약 유머 1번지에서 그때 부르지 않았으면 김형곤이 총대를 메지 않았으면 이삿짐 운반의 신성한 명령을 거부한 세상물정 모르는 주책없는 인간이 되어 은퇴당했을 것이다.


TV화면에 나가 무엇을 하든 이 세상 어디에선가 누군가는 보고 있다. 그리고 기억한다. 연기자의 일거수 일투족이 역사가 되고 재산이 된다.


보라! 각본을 쓰고 기획과 연출을 하여 꼭! 짜맞춘 것처럼 지난 40년간 연속적으로 예기치 못한 일들이 들이닥쳐 코미디협회장 24년 근속까지 오게했다. 그리고 어디로 튈 지 아무도 모른다. 그냥 서 있기만 했다. 밀어주고 아껴주고 빛 내주고 주변에서 만들어 줬다. 이쯤되면 가히 하늘에서 낸 사람이라 해야하지 않겠는가. 어떤 경우도 절망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짤린 것은 행운이었다. 전화위복이 됐다. 잘리면 죽는 것이 그 시대의 방송공식이었다. 잘리지 않으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것이 방송 생태계를 오랫동안 낙후시켰다. 데뷔와 동시에 초짜시절에 겁없이 역행하며 지금까지 잘려왔고 버텨왔다.


유머 1번지 개그맨은 경쟁프로그램 청춘만세 개그맨보다 평균연령이 10년 이상 젊었다. 청춘만세는 노련했지만 젊은 피를 수혈하지 않으면 한계에 부딪힐 정도로 위험했다. 개그 프로는 젊어야 한다. 방송은 젊어야 살아 남는다.


고맙다 잘라줘서. 인생역전 은혜주신 자르신 분 찾습니다! 잠실 13평 전세에서 내일 신길동 새로 지은 아파트로 이삿짐 나르러 가야한다. 경험상 용역회사에서 당당히 인건비 주고 인부를 쓴다. 웃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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