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칼럼]이승만의 생애와 신앙훈련의 풀무 불 시련
이승만은 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에서 태종 이성계의 장남 양녕대군의 16대 손으로 태어났다. 20세에 배재학당에 입학해 서양 학문과 기독교를 접했다. 그는 뛰어난 영어 실력으로 그는 모교에서 영어 교사로, 미국인들에게는 우리말을 가르쳤다.
21세에 서재필의 영향을 받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개화 운동에 앞장섰다. 23세때 고종 황제를 폐위하고 국민이 뽑는 대통령으로 세우는 공화정치를 실시하자는, 즉 왕이 주인인 나라를 백성이 주인인 나라로 세우자는 주장으로 검거되어 투옥됐다. 대(大)역적으로 사형수가 되었다. 온갖 고문과 엄청난 고통을 당했다. 목에는 칼을 차고. 양손과 발목에도 수갑을 찼다. 극심한 고난과 시련으로 죽을 날만 기다렸다. 그러나 이런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엄청난 불 시험은 훗날 모세처럼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로 쓰기 위한 풀무 불 시련이었다.
배재학당 시절 워낙 성적이 뛰어났기 때문에 그를 아끼는 선교사들이 그를 살리려 안간힘을 쏟았다. 마침 고종이 병이 들어 고통을 당하자 의료 선교사가 왕진하면서 이승만 구명 운동의 기회로 삼았다. "이승만이란 젊은이는 살려 두면 장차 나라에 큰 일꾼이 될 인재니 살려 두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 청원이 받아 들여져서 결국 이승만은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되었다.
한성 감옥은 이승만의 지옥 같은 지도자로서의 훈련소로 그를 그리스도의 군사를 만들었다. 한성 감옥에서 예수를 영접했으며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확신하여 많은 죄수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는 이준 열사, 이상재 선생을 비롯한 41명의 죄수를 전도 해 독립 운동과 나라를 위한 큰 지도자들로 세웠다.
청일전쟁이 발발한 시기에 "남아로 격분과 눈물을 참을 수 없어서" 독립 정신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비록 나라가 망하더라도 그 나라의 백성들에게 독립 정신이 남아 있다면 결코 완전히 망한 것이 아닐 찌라" 국민 전반의 문호 개방과 독립의 중요성에 대한 역설, 근대 국가에 걸맞은 정치 체제 모색, 독립과 문명 부강한 정치 체제, 전제 군주를 입헌 군주, 미국식의 민주정치를 강조했다.
서양이 얼마나 강한 가를 알고 우리도 강한 나라, 부강하고 문명이 발달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어야만 했다. 이러한 내용의 독립 정신 집필 내용은 최종 페이지까지 희망을 잃지 말 것을 역설했다. 이 독립 정신 원고는 비밀리에 이곳 LA에서 인쇄되어 배포되었다.
29세가 되던 해 민영환의 주선으로 5년 7개월의 감옥 생활을 끝내고 출소했다. 미국으로 건너온 그는 미국 정부에 일본의 한국 침략 저지를 호소했다. 명문 대학인 조지 워싱턴 대학, 하버드 대학,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최고 권위를 인정받는 청치 외교학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승만 개인에게는 명예라기 보다는 대한제국의 지도자로서의 가시 면류관이었다.
이승만은 영국과 미국에서 본 민주주의를 조국에 적용키 위해 뛰어들었다. 동포들을 계몽의 봉화를 일으켰다. 목숨을 건 채 독립협회 깃발을 들고, “만약 여러분 마음에 애국심이 없다면 그것은 죄입니다.”라고 외쳤다. 애국을 말이 아닌 생명 바친 실천으로 본을 보인 국부이시다. 일본의 손아귀에서 조국을 도로 찾아낸 영웅이요 조국의 독립과 근대화를 이끈 위대한 지도자다.
최학량 목사(사단법인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