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시니어] "시대가 요구하는 영화로 관객과 소통하는 것이 영화인"
서울영상위원회 위원장,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조직위원장, 락스퍼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직을 병행하면서 영화사 ‘하보우만’의 대표인 이장호 감독은 아직도 현역 영화인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 이훈구 기자
'별들의 고향' 이장호 감독 LA에 오다!
영화상영 50주년 기념 LA상영회 참석
"재미영화인협회 초청에 흔쾌히 동참"
"현역으로 남기 위해 활발하게 활동"
다큐영화 '하보우만의 언약' 제작 중
영화감독 이장호(80). 그가 LA에 왔다. 재미한국영화인협회에서 이 감독의 히트작 '별들의 고향' 상영 50주년을 기념해 특별상영회와 관객과의 대화, 디너쇼 등의 자리를 마련했다. 이 감독과는 CBS TV의 '이장호, 누군가를 만나다', 락스퍼국제영화제(SLIFF)에서의 작은 인연이 있던 터라, 인터뷰 자리를 갖게 돼 반가움이 더욱 컸다.
오랜만의 대면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에너지가 넘쳤다. 여든 나이의 ‘시니어’라는 말이 무색했다. 29살에 죽마고우였던 최인호 작가의 동명소설 ‘별들의 고향’ 판권을 무턱대고 구입해 자신의 영화계 멘토인 신상옥 감독을 따돌리고 좌충우돌하며 연출한 영화는 1974년 단관 개봉시절 국도극장에서 46만4308명의 관객을 불러들였다.
당시 영화계는 한국영화 4편을 만들면 외화 1편을 수입하던 시절이었던 만큼 3000~5000명 정도의 관객만 들어도 ‘본전’이라는 의식이 팽배하던 시절이었기에 영화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게다가 “오랜만에 같이 누워보는군”이라는 대사는 지금도 패러디 되고 있으며 이른바 ‘호스티스 멜로’ 영화를 양산하게 한 주인공이다. 이 영화의 백미는 아무래도 ‘키스씬’ 일 것이다. 당시 현동춘 편집감독은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는 키스씬을 아예 하나로 묶어 편집한 후 한꺼번에 보여주는 파격으로 당시 젊은이들을 흥분시키기도 했다.
◇별들의 고향 50주년
이 감독을 만난 것은 지난 25일 옥스포드호텔에서 열린 재미영화인협회 디너쇼에서다. 환한 미소로 기자를 맞은 이 감독은 대뜸 자신의 인생을 ‘철부지로 살았던 80년’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그에게 '별들의 고향'을 제외하고 꼽을 수 있는 영화에 대해 묻자 ‘바람 불어 좋은 날’(1980), ‘바보선언’(1984), ‘시선’(2014)을 꼽았다.
‘바람 불어 좋은 날’은 대배우 안성기의 출세작이자 규제에 발이 묶여 있다가 자유인이 된 이 감독이 다시 기지개를 켜며 동아수출공사를 통해 만든 영화다. 최일남의 소설 ‘우리들의 넝쿨’을 원작으로 하였으며 당대 소시민의 삶을 솔직 담백하게 그려내 좋은 평가를 받았다. 서울의 변두리 개발 지역에서 중국집(안성기), 이발소(이영호), 여관(김성찬)에서 일을 하며 서로를 위로하면서 생활하는 세 젊은이가 모티브다. 여기에 속물처럼 등장하는 면도사 미스유(김보연)의 존재는 자본주의 사회 대한민국의 민낯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우울한 삶의 연속이지만 그래도 희망은 있다’는 메시지를 관객들에게 던진 작품이다.
반면 ‘바보선언’은 1980년대 당시 영화정책에 반발해 만든 영화로 일반관객들에게는 좀처럼 이해가 어려울 수 있지만 ‘한국 뉴웨이브 영화’의 출발을 알린 작품으로 당초 예상을 깨고 단성사 단관 개봉 10만6423명의 관객을 모을 만큼 돌풍을 일으켰다. 개신교 영화 ‘시선’의 경우에는 이 감독이 자주 만드는 ‘종교영화’이기도 하다. 선교에 관한 복잡한 사정과 희생을 다룬 영화인데 그는 개봉 당일에 세월호가 침몰사고가 발생해 흥행에는 실패했다고 소개했다.
◇철부지로 산 80년
이 감독에게 건강에 관해 물으니 ‘철부지로 살아서’ 늙지도 않는단다. 지금도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술도 이따금 마시며 인생을 즐기고 있다고. 늙지 않는 비결로는 무엇보다도 계속 영화계 현역으로 남기 위해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 공식 직함이 많다. 서울영상위원회 위원장,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조직위원장, 락스퍼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 직을 병행하면서 영화사 ‘하보우만’의 대표로 지금도 다큐멘터리 영화 ‘하보우만의 언약’을 제작 중이다. 제목이 좀 특이한데 애국가에서 따온 것으로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의 약자라고 한다. 박은주 씨의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하며 대한민국의 건국과 경제발전에 기여한 이승만, 박정희 두 대통령의 업적을 조명하는 영화인데 스토리는 아직 밝힐 수 없다고 했다. 군부독재와 고도의 산업화가 진행 중이던 1980년대의 우울한 시대상과 물질만능주의가 부른 쾌락에 빠진 졸부들의 어두운 이면을 신랄하게 비판하던 그에게 의외의 작품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그는 “내가 ‘낮은 대로 임하소서’ 같은 기독교 영화도 많이 만들었잖아요? 그리고 락스퍼국제영화제는 북한인권의 문제를 주로 다룹니다. 그저 시대가 요구하는 영화를 만들어 관객들과 소통하는 것이 영화인 아닐까요?” 시종일관 유쾌했던 인터뷰 말미에 그는 조선일보LA 독자들에게 “별들의 고향 개봉 50주년을 한국에서만 할 수는 없잖아요? 당연히 재미영화인협회의 초청에 오케이 했지요!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라고 밝혔다. 그러고 보니 미소 속에서 영화 ‘바람 부는 날’에서 세상을 이겨 보겠노라고, 좋은 시절에는 바람 불어도 절대 흔들리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하던 세 청년 덕배, 춘식, 길남이 그의 모습과 오버랩됐다.
이훈구 기자 la@chosun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