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도 무찔렀다, 뭔들 못찌르랴


코로나도 무찔렀다, 뭔들 못찌르랴

김상윤 기자
마스크를 쓰고 피스트(펜싱 경기대)에 오르면 키 192㎝의 몸집이 위압감을 준다. 체구가 작은 선수들에게도 뒤지지 않는 스피드로 주도권을 잡고, 긴 팔다리를 이용해 칼로 찌르고 베면 상대는 예상보다 더 깊이 들어오는 공격에 애를 먹는다. 서양 선수들은 세계 무대를 휩쓰는 이 젊은 검객을 ‘괴물’(monster)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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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달 23일 막을 여는 2020 도쿄올림픽에 출전할 한국 펜싱 남자 사브르 대표팀 오상욱(25)은 1년 전이나 지금이나 부동의 금메달 유력 후보다.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단체전 금메달과 개인전 은메달을 받고, 2019년 세계선수권 개인과 단체전에서 모두 우승한 그는 2018-2019시즌부터 줄곧 세계 랭킹 1위를 지키고 있다.

펜싱은 2012 런던올림픽 금2·은1·동3이란 성적을 내며 대표팀의 새로운 ‘효자 종목’으로 떠올랐다. 특히 이번 대회에선 개막전 바로 다음 날 남자 사브르 선수들이 개인전에 출격한다. 출중한 외모로 ‘대표팀의 얼굴’이기도 한 오상욱에겐 한국 대표팀의 선봉장 역할도 주어졌다.

◇칼보다 무서웠던 코로나

코로나 사태를 빼놓고 이번 올림픽을 논할 수 없다. 그중에서도 펜싱 대표팀은 코로나와 유독 악연이 깊다. 지난해 여자 에페 대표팀 주전 4명 중 3명이 코로나에 걸려 그중 한 명이 은퇴했던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 올해 3월 팀의 미래로 꼽히는 오상욱이 코로나에 걸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것도 영국 변이 바이러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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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천적인 성격인 오상욱에게도 코로나는 쉽지 않은 상대였다. 그는 최근 본지 통화에서 “발병 초기에는 ‘죽을 수도 있는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 무서웠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오상욱은 3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1년 만에 나선 국제 대회에서 올림픽에서 개인전 2연패한 실라지 아론(헝가리)을 결승에서 눌렀다.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당시 근육통이 약간 있었지만 ‘경기를 오랜만에 뛰어서 그런가, 별거 아니겠지’라고 생각하며 비행기에 오른 그는 귀국 후 집 근처 선별진료소에서 양성 판정을 받았다.

“구급차가 와서 정신이 없었어요. 한 달 동안 병실에 격리된 채로 지냈죠. 몸살도 몸살인데, 무엇보다도 미각·후각이 없어진 게 가장 힘들었어요. 92㎏이던 몸무게가 한 달 만에 85㎏이 됐어요.”

그는 4월 중순 퇴원한 뒤 이틀 만에 다시 운동을 시작해 강도를 올렸다. 마음은 조급했지만 몸이 따라오지 못했다. 결국 기본기 훈련을 하다가 발목을 다쳤다. 국내 대회와 훈련을 쉬며 회복에 집중한 그는 지난 5일에야 보은실내체육관에서 촌외 훈련을 하던 대표팀에 합류했고, 구본길, 김정환 등 팀 선배와 함께 최근 진천선수촌으로 복귀해 팀워크를 다지고 있다.

다음 달 19일 출국을 앞둔 오상욱은 “부모님이 일본 내 코로나 확산을 걱정하시고, 나도 한번 걸려보니 두렵기도 하다”며 “그렇지만 랭킹이 높은 지금이 올림픽 금메달을 딸 절호의 기회”라고 했다.

“형들이 ‘올림픽에선 너무 긴장돼서 아무 소리도 안 들리고, 내가 뭘 했는지도 모르는 새에 게임이 끝나 있어’라고 경험담을 들려줬어요. 저는 첫 대회인 만큼 ‘하던 대로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큰 무대에서도 떨지 않는 강심장

자타가 인정하는 오상욱의 가장 큰 장점은 체격 조건이다. 긴 다리와 팔을 뻗어 길게 찌르는 ‘팡트’(Fente) 동작이 그의 주 무기다. 김형열 대표팀 코치는 “다른 선수가 찌를 땐 두 번 뒤로 빠져서 피할 수 있다면, 오상욱을 상대할 때는 네다섯 번씩 뒤로 빠져야 방어가 될 정도”라고 했다.

펜싱은 멘털이 매우 중요한 종목 중 하나로 꼽힌다. 크게 앞서다가도 한번 무너지면 10점, 15점도 순식간에 잃을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오상욱의 또 다른 최대 장점은 ‘강심장’이란 것이다. 타고난 성격에 더해 수년간 랭킹 1위를 지키며 많은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을 경험해 침착함을 쌓았다. 지난 3월 월드컵 결승에서도 실라지의 노련한 플레이에 밀렸지만, 경기 중간 1분간 쉬는 시간에 코치와 의논해 전략을 바꾼 뒤 1점 차 짜릿한 역전승을 거뒀다. 이번 대회에서도 금을 다툴 실라지와는 대진표대로라면 4강에서 만난다.

김 코치는 “코치진도 긴장하는 중요한 국제 대회에서도 국내 대회처럼 아무렇지 않게 나서는 모습에 놀라곤 한다”고 했다. 오상욱은 “단점이라고 할 수도 있다. 때때로 적절한 긴장은 필요한데 나는 타이트한 상황에서도 무덤덤하다”며 웃었다.

대표팀 에이스인 오상욱이 코로나 확진에 이어 발목까지 다치자 동료들도 걱정이 많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가 괜찮아지고 훈련도 정상적으로 소화하며 팀 분위기가 다시 밝아졌다. 오상욱은 “올림픽이 취소되면 너무 허탈할 것 같아 걱정했는데, 이제 정말 열린다는 게 실감이 난다”고 했다.

“우리 팀이 그동안 코로나 때문에 많이 힘들었지만, 그건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1년 전 승승장구하던 기세를 다시 몰아서 올림픽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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