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 전문가 “경복궁 후원 복원하자, 청와대가 갈 곳은…”


풍수 전문가 “경복궁 후원 복원하자, 청와대가 갈 곳은…”

김기훈 경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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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은행 발표를 보면 2019년 일본의 1인당 GDP(국내총생산)는 4만247달러로 세계 29위, 한국은 3만1762달러로 세계 34위이다. 아직 격차가 있다. 하지만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잘 이끌고 국민들이 합심해 국가 경제를 밀고 가면 머지 않아 극일(克日)하는 날이 올 수 있다.

한국 경제가 성장해 일본을 넘어서려면 아직도 남아 있는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국가 지도력과 국민들의 자긍심을 살려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이러한 자긍심을 살리는 가장 상징적인 과제로 서울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일본에 의해 두차례나 훼손된 경복궁의 완전한 복원을 꼽는다.

풍수전문가인 조남선 아주대 미래교육원 전임교수는 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이다. 최근에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기업인 등 제자들과 함께 자신들의 생각을 담은 ‘청와대! 새집 줄게 헌집 주오’라는 책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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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주장하는 경복궁의 완전한 복원은 어떤 모습일까? 지난 14일 오후 2시 경복궁 내 경회루 연못 앞 카페 ‘사랑’에서 조 교수와 마주 앉았다. 그는 멋진 개량 한복과 회색 중절모에 노란빛이 감도는 고운 가죽신을 신고 나타났다.

조 교수는 “1995년 김영삼 대통령이 경복궁 내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면서 경복궁 복원 작업이 진행중이지만 완전한 복원이 이뤄지려면 경복궁 후원도 옛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경복궁 후원 자리에는 지금 청와대가 위치하고 있다. 그렇다면 청와대는 어디로 이전해야 하나?

풍수와 인연 30년

—주로 하는 일은?

“동양학에서는 천기(天氣)를 다루는 역학, 인체(人體)를 다루는 동양의학, 땅의 기운(地氣)을 다루는 풍수가 있는데, 나는 이 3가지 분야 가운데 땅의 기운을 다루는 풍수를 연구하며 주로 강의를 하고 있다.”

—풍수와 인연을 맺은 계기는?

“작고하신 장인께서 약국을 운영했는데, 그 당시는 의약분업 전이라서 한약을 많이 다뤘다. 그래서 책장에 의학, 명리, 관상, 작명, 풍수 등 다양한 분야의 동양학 책이 많았다. 이 책 저 책을 펼쳐보다 보니 가장 관심이 가는 책이 풍수책이었다. 대부분 한문 서적을 한글로 번역해 놓은 것이어서 매우 어려웠다.

그것을 계기로 30대 초반에 풍수책을 보기 시작했는데, 나중에 현장을 접하니 매우 재미있게 느꼈다. 점차 풍수가 굉장히 과학적이고 실용적이라고 판단되어 좀 더 깊이 있는 공부를 하기 위해 대학원에서 전공을 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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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후에는 어떤 일을 했나?

“처음에는 풍수 공부하면서 중소기업을 다니다가 자동차부품 유통업과 부동산 중개업에 종사도 했었는데, 40대에 들어서면서는 풍수 강의를 시작했다. 2003년부터는 아주대 미래교육원에서, 2017년부터는 연세대 미래교육원에서 강의를 시작해 지금까지 하고 있다.”

—연세대는 기독교 전통이 강한 학교인데 어떻게 강의를 하게 됐나?

“2017년 상반기에 강의 개설신청을 했더니 면접을 보러 오라고 해서 갔다. 첫 질문이 ‘우리학교가 기독교 학교인 것 아시죠? 우리 학교 이념과 풍수가 충돌이 생기는 것 아닙니까?’였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나?

“내가 쓴 책을 바탕으로 ‘풍수 관점에서 볼 때 땅은 좋은 성질의 땅과 나쁜 성질의 땅이 있으므로 사람들이 좋은 성질의 땅을 선택해서 살자는 환경 학술이 풍수’라고 설명해줬다. 종교는 숭배 개념이지만 풍수는 숭배가 아니고 선택의 개념이므로 학교 이념과 충돌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 자리에서 바로 개강을 승낙해 주셨다.”

경복궁의 명암

인터뷰 주제인 경복궁 복원 문제로 화제를 옮겼다.

—경복궁을 완전히 복원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고 있는데, 무슨 뜻인가?

“경복궁의 역사에 대해 먼저 알아야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태조 이성계가 1392년 7월 17일에 왕위에 오른 뒤 1392년 8월 13일에 한양을 특정해 천도를 선포했다. 아마 최측근인 무학 대사의 조언을 받아 천도를 생각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그래서 한양과 경복궁이 조선의 역사에 등장하게 된다.

1394년 10월 한양으로 천도를 하고 1395년 9월 경복궁이 완공되었는데, 1398년 8월 26일에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아버지의 측근들과 이복 동생을 모두 죽이는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충격을 받은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서 물러나자 이성계의 둘째 아들 방과(2대 정종)가 왕위를 물려받았고, 이듬해인 1399년 2월에 개성으로 수도를 다시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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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에 어떻게 됐나?

“정종과 이방원 모두 한양에 미련이 없었다. 태조 이성계만 ‘개성은 왕씨의 땅’이라고 생각하여 한양을 고집했다. 그런데 개성으로 돌아가 한양을 포기하고 난 뒤 전국적으로 홍수 등 천재지변이 많이 생겼다. 임금이 된 이방원(태종)은 하늘이 노했다고 생각해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 다시 개성을 떠나기로 한다.

하지만 경복궁은 태종 자신이 1398년에 피바람을 일으켰던 곳이라 피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다른 곳을 찾았고 최종 후보지로 1안은 개성 잔류, 2안은 한양, 3안은 무악으로 정리됐다. 무악은 현재 연세대 자리이다.”

이방원의 동전 던지기

—어떻게 선택했나?

“이방원이 이 세가지 안에 대해 종묘에 가서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낸 뒤 동전의 앞면은 길(吉), 뒷면은 흉(凶)으로 정하고, 각각 3번씩 던졌다. 그 결과 개성 잔류와 무악 안은 2흉 1길이 나왔는데, 한양 자리는 2길 1흉이 나왔다. 그래서 한양에 창덕궁을 지어 재천도를 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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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은 경복궁에 살지 않았나?

“그렇다. 다만 평소에는 살지 않았어도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는 경복궁에 갔고 관리는 계속했다. 태종이 죽기 전에 왕위를 세종에게 선위했는데, 그때부터 왕들의 경복궁 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경복궁은 서열 1위 궁궐인 법궁(法宮)으로, 창덕궁은 부속 궁궐이라는 의미의 이궁(離宮)으로 불렸다. 그러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한양 천도 과정에서 세워진 경복궁과 창덕궁, 성종 대에 만든 창경궁 등 3개 궁궐이 모두 불에 탔다. 기록상으로는 백성들이 방화를 했다고 되어 있지만 왜군이 불을 질렀다는 주장도 있다.”

—선조는 궁궐을 복구하지 않았나?

“임진왜란이 끝난 후 궁궐을 다시 짓고 싶었으나 나라에 돈이 없었다. 선조는 월산대군(세조의 장손자)의 사저(현재 덕수궁)에서 오랜 기간 생활하면서 미루고 미루다가 경복궁이 소실되고 15년여가 지난 뒤 복원 준비를 시켰는데 전직 현령이었던 이국필이 상소를 올려서 경복궁은 터가 좋지 않으니 창덕궁을 지어야 한다고 진언했다. 그래서 갑자기 경복궁을 복원하려고 준비한 자재로 창덕궁을 짓게 됐다. 이후 고종 대에 경복궁이 중건될 때까지 임금들은 모두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등에서 살았다.”

고종의 1차 경복궁 복원

—그러면 경복궁은 언제 복원됐나?

“1865년에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으면서 경복궁 중건 사업이 시작됐다. 고종 대에는 조선 초기보다 더 규모가 크게 복원을 했다. 그러나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가 망하면서 1911년 경복궁 토지 소유권이 조선총독부로 넘어갔다. 그 때부터 일제는 자기들 마음대로 훼손했다. 빽빽히 있던 다른 많은 건물들이 헐려 나갔고, 1915년에는 경복궁 안에서 조선물산공진회라는 박람회도 개최했다. 1926년에는 경복궁 남문인 광화문을 동쪽으로 옮기고 흥례문이 있던 부근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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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북쪽에 있는 청와대도 경복궁 일부였나?

“원래 경복궁 후원이었다. 그런데 일제가 1937년에 본원과 후원을 분리하고 중간에 길을 내면서 지금처럼 별도의 권역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곳에 총독 관저를 지어 용산에 있던 총독 관저를 옮겼다. 해방 후에는 미군정 장관이 살았고, 이승만 대통령 때에는 경무대로 부르다가 윤보선 대통령 때 청와대로 이름을 바꿨다. 노태우 대통령 때 청와대 건물이 너무 좁고 낡았다고 판단하여 다른 자리에 지금의 청와대 건물과 관저를 새로 지었다. 옛 총독관저 건물은 김영삼 정부 때인 1993년에 철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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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은 두 번 모두 일본이 훼손한 셈인가?

“그렇다. 조선 태조 대에 창건한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문에 불탔고, 고종 대에 중건한 것은 일제 때 민족정기를 흐트러뜨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훼철한 것이다.”

진행중인 2차 복원 작업

—해방 이후 복구 작업은 어느 정도 진행됐나?

“1995년 김영삼 대통령이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광화문과 흥례문을 복구한 것이 가장 가시적인 성과이다. 하지만 아직 경복궁 복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남아 있다. 일제가 훼손한 후원을 복원해야 한다.”

조 교수가 왼 손을 들어 카페 북쪽 유리창 너머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를 가리켰다.

“저 북쪽에 보이는 것이 북악산이다. 원래 경복궁이 후원까지 복원되어 국민들 품으로 돌어오면 국민들이 북악산에도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후원 자리에 청와대가 자리를 잡고 있어서 북악산 접근이 안된다. 청와대 자리, 그러니까 옛 총독 관저 부지를 다시 경복궁 후원으로 복원시켜야 국민들이 온전한 경복궁을 보고 옛 조상들의 흔적을 제대로 공부하게 된다. 내외국인 관람객들이 창덕궁에 가서 후원을 둘러보며 옛 궁궐 사람들의 전체 생활상을 조명해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되어야 한다.

특히 중요한 것은 단순히 북악산 접근성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거기에 남아 있는 일제의 잔재를 완전히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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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후원은 원래 무엇을 하던 곳인가?

“고종 때 복원한 뒤에는 거기에 융문당 융무당 등 건물과 옥련정 등 정자가 있었다. 임금이 계속 머물지는 않고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었고, 무과 시험을 보는 장소로도 썼다. 일종의 휴식공간이었다. 창덕궁 후원과 비슷한 개념이다. 또 지금 청와대 서쪽에는 임금이 영농 체험하는 경농재와 팔도배미라는 논이 있었다.”

경복궁 후원도 함께 복원돼야

—후원을 복원한다면 어떤 모습으로 복원해야 하나?

“고종이 복원했던 모습 그대로 되살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본다. 역사적 의미를 그대로 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경복궁 복원 작업은 후원만 복원하면 되나? 아니면 다른 곳도 더 복원해야 하나?

“경복궁 안쪽도 복원할 일이 많다. 고종 대에 중건을 한 후에 그려진 경복궁 배치도인 북궐도를 보면 지금의 고궁박물관과 민속박물관은 모두 철거해야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원래 빼곡히 들어차 있던 부속건물들을 차례로 복원해야 한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래야 경복궁이 온전히 복원된다.

관람객이 경복궁에 오면 광화문에서 근정전을 관통하는 중심축과 경회루만 보고 나면 볼 것이 없다. 청와대가 있는 후원과 현재 고궁박물관과 민속박물관 주변도 모두 옛 모습대로 복원해야 제대로 된 경복궁의 옛 모습을 보게 된다. 특히 청와대 자리는 일제 잔재가 남아 있으니 청와대가 있는 후원부터 복원하고, 궁성 안쪽은 북궐도 그림에 따라 20~30년이 걸리더라도 모두 복원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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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궐도를 보면 당시 건물이 어떠했나?

“당시에 궁내에 건물이 매우 많았다. 그 때처럼 많은 건물들이 있다면 요즘 관람객들이 이 골목 저 골목 다니면서 두루 관람을 하며 역사와 문화 등을 배울 수 있는데, 일제가 이 건물들을 다 없앴다. 그래서 일제 청산과 극일의 가장 상징적인 작업이 경복궁의 완전한 복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복구해야 하는 부속건물들에 대한 사진들이 남아 있나?

“원거리 사진은 몇장 남아 있지만 세밀한 사진들은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조 교수의 경복궁 복원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다. 그런데 경복궁 후원을 복원하려면 청와대를 이전해야 한다. 이야기의 초점을 청와대에 맞췄다.

☞ ②/③ 이어 보기

(위의 ‘이어 보기' 아이콘이 클릭되지 않으면 검색창에 ‘조남선 경복궁’을 입력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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